[성기숙의 문화읽기] 치욕의 역사를 품은 곳, 중명전 그리고 태평무
[성기숙의 문화읽기] 치욕의 역사를 품은 곳, 중명전 그리고 태평무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0.01.1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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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기숙 한예종 교수/무용평론가
▲ 성기숙 한예종 교수/무용평론가

며칠 전 중구 정동에 위치한 중명전(重明殿)을 찾았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치욕의 장소다.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야망은 파죽지세로 뻗어나갔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려는 야욕을 품었다.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치밀한 계략을 꾸미고 실천에 옮겼다.

조선에 특사로 파견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소임이 주어졌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수십 명의 헌병을 동원, 중명전을 에워싸고 대신들을 위협했다. 고종과 조선대신들의 반발은 거셌으나 역사는 우리편이 아니었다. 조선대신들이 일제의 압박에 굴복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종은 중명전 2층 침소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이를 지켜봤다고 전한다.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 1905년 을사년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해 을사늑약 체결에 가담한 다섯명의 대신들을 일컫어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한규설을 제외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이 해당된다. 이들은 왜적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을사늑약 체결이후 조선에는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당했다. 주권국가로서의 본질을 잃게 되자 조선의 의인열사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민영환이 자결했고 초야에 묻혀지내던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켰다. 언론인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기고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상에 널려 알렸다. 선조들은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버리거나 투옥되면서까지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정동극장 골목으로 들어서자 중명전 입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1900년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한 중명전은 궁궐 내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기록된다. 아치형의 고풍스러운 외관이 인상적이다. 황제의 서재로 사용할 용도로 지어졌으며, 원래는 수옥헌(潄玉軒)이라 불렸다.   

1층 전시실 메인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현장을 모형으로 꾸며놓았다. 기다란 탁자 중앙에 이토오 히로부미가 버티고 있는 가운데 양편으로 아홉명의 조선대신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긴박했던 당시 상황이 느껴지는 듯 했다. 특히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로부미에게 시선이 멈춘다. 신무용가 배구자의 출생설과 맞물려 있는 인물이기에 주의깊게 살폈다.

배구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고모 배정자와 이토오 히로부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설과 배정자의 친정조카라는 설이 있다. 빼어난 용모와 화려한 언술을 지닌 배정자는 이토오 히로부미의 정부로 알려진 인물이다. 일본 밀정으로 활약했다는 설도 있다. 배정자의 친일행각은 이토오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저격된 후에도 지속됐다고 한다.  

한편 배구자가 배정자의 친정조카라는 설 또한 흥미롭다. 연극학자 유민영 교수는 배구자의 출생연대 등 실증자료를 토대로 배구자가 배정자의 조카일 가능성에 힘을 보탠다. 전형적인 조선의 미인상을 지닌 배구자는 한국 근대무용의 선구자로 명성이 높다. 

무용가 배구자는 한마디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일본 덴카츠예술단의 스타무용수를 거쳐 민족무용의 양식화에 몰두하여 여러 편의 신무용 명작을 남겼다. 남편 홍순언과 동양극장을 설립하여 근대공연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동양극장 폐쇄이후 일본에 망명했고 예술활동도 접었다.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0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녀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출생과 관련 비밀의 열쇠를 풀지 않았다. 일본왕자와 조선공주 사이에서 탄생했다거나 명성황후의 손녀라는 등 망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냈다. 베일에 쌓인 출생의 비밀은 더 굳게 닫힌 셈이다. 

중명전에 전시된 이토오 히로부미 모습은 고증을 통해 제작됐다고 한다. 배구자가 그의 고모 배정자와 이토오 히로부미 사이에서 탄생한 사생아라면 혹시 어딘가는 닮은 구석이 있지 않을까. 이토오 히로부미 모형 앞에 오래도록 머문 이유였다. 그러나 그들이 혈연관계일 가능성을 간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배구자의 출생에 대한 궁금증을 떠안은 채 발길을 돌렸다.  

과거 덕수궁의 실제 모습을 축소해 놓은 모형 전시실과 헤이그특사 파견을 다룬 전시실을 지나 의외의 공간에서 발길을 멈춘다. 조선대신 한규설을 조명한 제2전시실 “한규설, 그날 밤을 회고하다” 코너다. 이곳엔 「한말정객의 회고담-前 참정대신 한규설씨 談」을 제목으로 1930년 1월 1일에서 3일까지 동아일보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가 전시되어 있다. 

한규설은 을사늑약 체결 당시 유일하게 반대한 참정대신으로 알려져 있다.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자 일제는 그를 중명전 마루방에 감금시켰다. 한규설은 결국 파면당하여 직위를 잃었다. 대신 그는 25년이 지난 1930년 정월 초하루 일본의 무력과 강압속에 체결된 을사늑약 당시의 상황을 회고담으로 남겼다. 기록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것이다.

순간 한 가지 잔상이 스치고 지나간다.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 불공정 논란과 관련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에, 보유자 선정 심의가 이루어진 ‘그날의 진실’을 회고할 미래의 한규설도 있지 않을까. 무용계는 2019년 11월 15일을 ‘치욕의 날’로 여긴다. 미지정 종목인 태평무 보유자 인정의 문제점 및 무형문화재위원회 회의 시, 의결정족수 미달 등 여러 법령위반 의혹이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태평무는 5년 전 보유자 인정 불공정 논란의 씨앗이 됐던 춤이다. 민족의 혼과 얼의 상징인 태평무 보유자가 불공정 편파논란 속에 선정됐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태평무는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이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며 창안한 이른바 민족문화유산이 아니던가.

한성준이 창안한 태평무는 한영숙과 강선영으로 맥이 이어졌고, 강선영류 태평무만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다. 한영숙류 태평무는 이제껏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그런데 미지정 종목인 한영숙류 태평무에서 보유자가 나왔다. 더군다나 태평무 종목으로는 이수자도, 전수조교도 아닌 무용가가 어느날 갑자기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보유자가 된 것이다.

미지정 종목에서 보유자가 탄생되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무형문화재 지정에서 가장 중요한 준거인 유파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무용계는 한마디로 혼란스럽다. 무용계를 혼란에 빠뜨린 장본인이 무용전공 무형문화재위원이 아닌, 타분야 위원들이라는 점에서 파장이 컸다. 보유자로 선정된 무용가들도, 이를 심의한 무형문화재위원들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2019년 문화재청과 11명의 무형문화재위원들은 한국무용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겼다. 무용계는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문화재청장과 무형문화재위원장 즉각 퇴진할 것, 그리고 무형문화재위원회를 해체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무용분야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 불공정 논란이 지속되자 문화재청장이 국정감사에 소환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국감장에서의 핵심 쟁점은 “의결정족수 미달” 그리고 “위임” 문제로 귀결되었다. 11명의 무형문화재위원 중 5명이 참여한 태평무 보유자 인정 심의 때 불거진 의결정족수 미달문제는 “위임” 여부의 해석이 관건이었다. 언론에 보도됐다시피 “위임”과 관련 국감장에 선 문화재청장의 답변은 궁색한 변명으로 들렸다. 안타까웠다.

공교롭게도 태평무 보유자 심의 땐 무용분야에 할당된 2명의 무형문화재위원은 모두 배제됐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비전공자들에 의해 종신제(終身制)로 지원되는 무용분야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선정된 셈이다. 무용계에서 ‘치욕’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총 11명의 무형문화재위원 중 고작 5명이 참여한 태평무 보유자 심의는 이례적으로 저녁 8시 넘어서까지 진행됐다고 한다. 당시 심의에 참여한 5명의 무형문화재위원들은 혹여 ‘심리적 감금’ 상태에서 태평무 보유자를 결정해야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날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더러는 ‘불편한 진실’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들도 있을 게다. 먼 훗날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감금되고 파면당한 한규설과 같은, 그날의 진실을 고백할 그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그는 그나마 양심을 지닌 학자로서 후대 역사에 기억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