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몸은 마음의 집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몸은 마음의 집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0.02.1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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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2019년 11월 7일, 제31회 <이중섭미술상>이 화가 정복수에게 돌아갔음을 알리는 선언이 이 미술상 시상식장에서 있었다. 때 맞춰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린 [정복수 수상기념전]은 지난 40여 년간 집요한 일념으로 오로지 ‘인간’을 화두삼아 작업을 해 온 정복수의 그간의 노력에 상응하는 응분의 보상이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다시피 정복수는 지독한 눌변이다. 그러나 그는 다소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꼭 필요한 말만 뽑아내는 사람이다. 한 사람의 화가로서 오랜 세월을 내면에서 갈고 닦은 그 말들은 가히 촌철살인의 경지를 이룬다. 말의 에센스, 그가 뿜어내는 어록(語錄) 중에는 예컨대 “몸은 생각의 좋은 집이 돼야 한다. 그러나 집들이 온통 비밀스럽고 오염돼 있다.”와 같은 것이 있어 그의 사고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몸을 가리켜 ‘마음의 집’으로 간주하는 정복수에게 있어서 ‘오염된 몸’은 마치 쓸고 치우지 않아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집과도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복수에게 있어서 신체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그가 이 말을 통해 겨냥하는 것은 ‘사회적 의미’의 몸이라는 사실이다. 주지하듯이, 개별적 존재자로서의 인간들이 모여 집단을 이룰 때 일컫는 사회는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너의 생각이 바르고 정확할 때 그 의미는 나에게 통하고, 나의 생각이 너에게 정확히 전달될 때 그 의미 또한 너에게 통할 것이다 라고 하는 이 지당한 말씀이 사회적으로 반드시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정복수,마음의집(2019)(도판=윤진섭 제공)

정복수를 화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예술을 통한 그의 집요한 질문과 저항, 도전, 풍자는 그가 몸을 가리켜 ‘마음의 집’으로 본 특유의 시각을 통해 전달되고 있는데, 그는 단적으로 그 집이 ‘비밀스럽고, 오염돼’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말과 글은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매개체인데, 그러한 말과 글이 오염돼 서로 소통을 이루지 못하고 왜곡되거나 굴절돼 전달될 때, 피차간에 감정이 사나워지게 되고 종국에는 비방과 폭력으로 얼룩지기에 이른다. 정복수는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사회에서 예리한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제까지 그가 그려 온 그림들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함의를 지닌 다양한 인간상에 대한 그 나름의 임상적 진단인 셈이다.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원래 정복수의 그림은 ‘폭력에 대한 폭력’이라고 할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거칠고 조야(粗野)한 날 것 그대로의 느낌과 강렬한 도발성을 주무기로 삼은 그의 화풍은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아왔다. 그러한 사정은 어느덧 6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거의 변함이 없지만, 작가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전위의식과 실험정신은 그의 작업을 관류하는 키워드이다. 전위(avant-garde)의 전사란 무엇인가? 한 사람의 척후병으로서 문화의 맨 앞에 서서 낡은 가치와 신념들에 맞서 싸우는 실험정신의 소유자를 일컫는다. 그런 한 사람의 작가로서 정복수가 평생을 일관되게 유지해 온 도전의식과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과 실험적 욕구는 그를 진정한 예술의 전위주의자로 바라보게 하는 요인들이다.

▲정복수,사라져가는존재의환영들(1994)(도판=윤진섭 제공)

정복수는 체질적으로 미술계에 만연돼 있는 낡은 관습과 조형어법(심지어는 자신의 낡은 회화적 관습과 조형어법 조차도)에 함몰되는 것을 못 견뎌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작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준 작가이기 때문에 <이중섭미술상>을 수여한다는 심사위원회의 결정은 그의 예술이 지닌 전위적 급진성과 실험정신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복수는) 청소년기에 홀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자기세계를 고유의 스타일로 구축해 온 작가이다. 작업의 의지, 독자적 감수성, 그 감수성을 증명하는 작품성으로 한국 형상미술에서 독특한 지점을 점유했다”는 심사평은 정복수의 예술이 지닌 의미를 함축한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여기에 전위적 급진성과 도전의식, 그리고 과감한 실험정신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다. 그만큼 정복수에게 있어서 이러한 작가의식은 거의 체질화돼 있기 때문이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