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충무로야사]-나의 영화계 입문기(김하림군과 나) 2-
[연재-충무로야사]-나의 영화계 입문기(김하림군과 나) 2-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09.11.2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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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배우 김지미와 최무룡

우리가 유명 영화감독이나 문단의 명사들을 만나기 위해 명동과 충무로를 부리나케 드나들던 그시절. 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으로 문화예술인들의 인구에 회자되었던 저 유명한 명동파 시인 박인환선생은 이미 숱한 전설을 남긴채 숙녀의 옷자락과 함께 목마를 타고 명동을 떠난 뒤였다.

“바람이 불고 비가내리면 나는 저 유리창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중략)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되어 나뭇잎에 덮혀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우리들은 희망을 안고 매일처럼 명동과 충무로를 배회하다가 통금 싸이렌 소리에 쫓겨 돈암동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이후 난 당분간 김공훈(김하림)군과 만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하숙집에 틀어박혀 과제물과 소설습작에 몰두했다. 더 이상 김군과 명동 충무로를 방황하다간 학교수업을 제대로 해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군은 매일 전화를 해대거나 나의 하숙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나는 하숙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하숙집은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 미아리 고개위로 올라가다보면 왼쪽 언덕바지에 있는 노란 2층집이었는데, 2층엔 나와 연극영화과 학생 이상진군과 고교생 2명이 함께 있었고 아래층과 이웃하숙집엔 전남광주 조선대부속고등학교에서 예술대로 진학한 미대생들이 대거 하숙을 하거나 자취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화단의 거목이었던 오지호화백과 임직순화백의 수제자들이었다.

하숙집 뒤쪽엔 아리랑고개로 넘어가는 언덕길이 정릉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는데 그 길목입구에 요즘으로 말하면 서구식빌라(?)두채가 아래위로 연해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래층빌라엔 영화 ‘성불사의 밤’으로 처음 데뷔한 이빈화양이 살고 있었고 윗층빌라엔 당시 유명했던 영화감독 홍성기씨와 이혼한 여배우 김지미양이 인기절정이었던 동료배우 최무룡씨와 은거하고 있었다.

짓궂은 하숙생들은 밤마다 부근 공사장에서 건축용 사다리를 옮겨와 담 너머로 이빈화양의 집 마당을 훔쳐보았다. 그러다 파출소로부터 몇 번씩이나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들 유명배우들이 살던 집까지는 승용차가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이빈화양과 김지미양은 고급승용차를 하숙집밑 공터에 주차시켜 놓았었는데 하숙생들은 그들 승용차의 번호판을 떼어 감춘후 막걸리값을 요구하곤 했다. 영화배우들은 처음 한두번은 하숙생들의 장난을 애교로 봐주었던지 선선히 배려를 해주었는데, 학생들의 짓궂은 행위가 계속되자 결국은 동선동사무소와 부근 파출소로부터 경고가 떨어졌다.

나는 다행히 과제물에 몰두하느라 그 장난에 껴들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했다. 후일 영화계에 들어와 우연히 최무룡씨를 만난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토로했더니 그는 파안대소하며 오히려 반가워했다. 그 사건이 있고 난 며칠후, 학교에서 김하림군을 만났는데 대뜸,

“야! 이무(이진모)! 나 말이야 우연히 충무로에서 정진우감독을 만났는데 기똥찬 청춘영화시나리오 한작품 쓰기로 했어!” 하는 것이었다.

“그래? 잘됐네! 열심히해봐!”

나는 좀 심드렁하게 반응하면서 김군을 피하려 했는데 그는 끈질기게 따라 붙으며,

“근데 뭐 청춘영화 소재 좋은거 없냐?”하며 내 표정을 살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난 시나리오엔 관심없어”

하고 문예창작과 학생들의 토론장으로 피해버렸다. 며칠후 김군은 하숙집으로 다시 찾아왔다. 시나리오 쓰느라 절치부심한 탓인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야! 시나리오가 안풀려 미치겠다”

하면서 자신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 내용을 대충 늘어놓았다. 내용인즉, 외국으로 유학갔던 학생이 귀국했다가 국내 여대생과 사랑에 빠진후 4월이 되면 다시 외국으로 떠나며 슬픈 이별을 하게 되는 아주 단순한 내용이었는데, 김군은 침을 튀기며 열을 올렸다. 나는 그냥 묵묵부답 듣고 있었다.

“뭐 참고할만한 외국영화 없냐? 너 외국영화 안본거 없잖아!”

김군은 은근히 나를 추켜세우며 다그쳐 물었다.

“너 로마의 휴일 봤지?”
“로마의 휴일?”
“그래 오드리햅번이 그레고리펙과 공연하고 윌리엄와일러가 감독한 작품말이야”
“야! 그거 안본사람이 어딧냐?”
“그거 다시한번 보라구!”

나는 모르는 사이에 김군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었다.

“제목도 정해졌어! ‘4월이 가면’이야! 어때? 근사하고 멋있지 않냐?”

나의 머릿속엔 이미 영화 ‘로마의 휴일’의 명장면들이 한국의 명소들을 배경으로 신속하게 영화장면화 되고 있었다.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