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딱지 10회
[연재] 딱지 10회
  • 김준일 작가
  • 승인 2009.11.26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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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손님 (4)

두 가족이 숲속에서 마주친 것은 늦가을 햇볕이 화창한 일요일 오후였다. 국민학교 교사라는 회장의 아들 동복은 정구와 동갑이었고 그의 아내 경애는 미순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벌써 은영이라는 여덟 살 난 딸이 있었다. 회장과는 달리 동복과 그 딸은 말수가 적고 조용했다. 오히려 회장을 닮은 것은 며느리 쪽인 것 같았다. 경애는 농담도 잘하고 웃기도 잘했다.

집사님 앞에서 술 좀 마셔도 괜찮겠습니까?

두 가족이 풀밭에 자리 잡고 앉았을 때 정구가 소주병을 꺼내면서 물었다.

아이구 괜찮다 마다.

회장은 손을 내저었다.

예수님하고 그 제자분들도 매일같이 포도주를 마셨어요 매일같이.

두 가족은 금방 친해졌다. 하긴 그런 숲속에서 만나면 어떤 가족도 친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회장이 또 한번 실수를 하고 말았다. 다시 아기 얘기를 꺼내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내일부터 새댁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주님의 은총으로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서 회장은 자신이 총무를 위해서도 기도를 하고 있다고 묻지 않은 말까지 했다.

그 집은 동성동본이라 지금까지 혼인신고도 못한 채 살고 있어요. 그 집 딸 윤이가 지금 중학생인데 아직까지 사생아로 돼 있다니 말이나 돼요?

정구는 슬그머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혼인법이 개정되도록 해 달라는 기도에다 아기를 점지해 달라는 기도까지 무척 바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총무 얘기 때문에 숲속의 가족모임은 갑자기 정치토론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여자들은 혼인법 개정을 미루고 있는 정치인들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책임은 우리 여자들한테 있어. 유권자 가운데 절반이 여자니까 똘똘 뭉치기만 하면 여자 대통령도 나올 수 있는데 그런 의식들이 있어야지. 우리나라 여자들은 쫄쫄 눈물이 나올 때까지 더 당해 봐야 돼.

그러면서 회장은 “고통받고 있는 총무를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이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순이 물었다.

처음 봤을 때 총무 그 여자 얼굴에 수심이 낀 것 같았는데 이제 알겠네요. 그런데 왜 그렇게 화장을 진하게 했죠?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감추고 싶어서 그럴 거야.
엄마 저것 좀 봐!

은영이 갑자기 소리질렀다. 다람쥐였다. 다람쥐 한 마리가 나무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멈춰서 빤히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총무 이야기는 끝이 났다. 다람쥐는 숲속으로 사라지고 두 가족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로 그 총무와 마주쳤다. 총무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녀는 허름한 승용차 트렁크에다 짐을 싣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남편과 딸, 그리고 여드름이 잔뜩 난 청년까지 덤벼들어 비닐봉지에 든 반짝거리는 물건들을 싣고 있었다. 두 가족과 총무는 서로 고개만 까딱했을 뿐 더 이상 아는 체를 하지 않은 채 지나쳤다.

그러고 보니 월말이 다 됐군 그래.

회장이 말했다.

저 윤이 아빠가 직공 하나만 데리고 지하실에서 악세사리를 만들고 있어. 그걸 한 달에 한 번씩 남대문 시장으로 내가는 거지.

미순은 총무가 진한 화장과 정장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뿐만이 아니고 남편의 직업까지도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