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무지개 너머의 세상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무지개 너머의 세상
  • 윤영채/밀레니엄 키즈
  • 승인 2020.06.3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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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채(2000년 생) 21살의 카페 부사장이자 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대입 삼수생이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존 말코비치 되기’, 좋아하는 책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좌우명은 ‘마음먹기 나름!’, 훗날 떠나게 될 마다가스카르 여행에서의 설렘을 미리 기대하며 살고 있다.
윤영채(2000년 생) 21살의 카페 부사장이자 영화과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대입 삼수생이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존 말코비치 되기’, 좋아하는 책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좌우명은 ‘마음먹기 나름!’, 훗날 떠나게 될 마다가스카르 여행에서의 설렘을 미리 기대하며 살고 있다.

2019년 12월의 어느 날, 기대하고 준비했던 대입 2차 시험에 응시할 기회조차 완벽하게 박탈당해 몹시 울적한 걸음을 나는 걷고 있었다. 이따금 할 일이 없으면 찾게 되는 종로의 한 대형 서점에서 이리저리 수줍게 그리고 목적 없이 방황하는 똥파리처럼 주변을 탐색하다가 문구류 코너에서 48색의 빛나는 무지개 펜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느껴졌던 마음의 평화를,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어갔던 그 기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것을 사 들고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고 어루만지며 집에 도착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주 어렸던 날에 읽었던 한 동화에서, 무지개의 끝엔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부터 비가 오는 날엔 어서 빨리 그치길, 해가 이 축축한 기운을 빨리 빨아들여 주길 바랐었다. 그래서 무지개가 뜨면, 언제고 짐을 챙겨 그 보물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표류하기도 하면서, 결국은 보석으로 이루어진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무인도에 도착하는 꿈을 꾸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사실 살면서 하늘에 뜬 일곱 빛의 무지개를 그것도 서울에서 보기란 꽤 힘든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엄마가 화단에 물을 뿌릴 때 살짝 지나가는 그 환상의 빛을 바라보는 것과 집에 뒹굴고 있는 유행 지난 각기 다른 종류의 색깔 펜 몇 자루로 빨주노초파남보를 순서대로 찍찍 그어보는 수밖엔 없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고 예술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진심을 담아 그린 그림이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그렇게 조금씩 내게는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 이렇게 현실이라는 건 동화와는 다른 것이구나. 이 세상을 찢어버릴 수만 있다면, 새롭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시 새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런 감정의 태풍은 대략 초경이 시작될 무렵 조금씩 잦아들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갈 때 즈음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학교에 들어가서 내 앞으로 오는 청구서에 돈을 낼 수 있을 만큼의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모험과 항해의 전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되면서 내 세상도 함께 무너졌다. 아. 바다를 탐험하는 멋진 사람이 되길 바랐는데, 지금쯤이면 무지개 끝 보물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젠장 너무 거지 같은 현실이다. 하고 욕도 했었다. 어떤 환상이나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21세기의 지구에서 그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며 일하고 밥 먹고 자다가 때가 되면 죽어버리게 될 ‘나’라서. 그저 내가 이쑤시개에 붙은 음식 찌꺼기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이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열아홉에 했다.

그 이후 기나긴 두 번의 대입 실패를 맛보고 나서 한참을 거리 위에서 방황하다가 48색 무지개 컬러 펜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구입해 가는 길에 담담함이 섞인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보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젠 그런 꿈도 없어서 딱히 바랄 것도 없이 그저 나에게 날아오는 카드값을 메꿀 수 있는 그저 그런 어른이 되었으면 하는 지금, 오히려 나의 세상은 편안하고 따뜻한걸. 한때는 인생이 동화가 되었으면 했던 내가 어떠한 바램도 없이 묵묵히 살아가는 스물한 살이 되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지만 나는 지금 이 모습이 마음에 든다.

이제야 새벽이슬과 함께 피어나는 무지개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오늘도 난 컬러 펜을 꺼낸다.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보라색 그리고 분홍색으로 찌익 찌익. 가끔은 듣기 싫을 때도 있는 마찰음을 내며 노트에 순서대로 그려본다. 힘의 강도에 따라 달라지며 펜이 종이 위를 스쳐 가는 느낌이 내 팔목과 어깨, 머리를 통해 그대로 가슴으로 전해오는 바로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 여전히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어떤 뜻으로 구획될 수 있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이대로 현재에 충실히 살다 보면 ‘그 답’에 도달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수줍게 생각해 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