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연극 월화] "세상이 여배우를 배우로 봐주지 않으면 네가 바꿔라"
[특별기고-연극 월화] "세상이 여배우를 배우로 봐주지 않으면 네가 바꿔라"
  • 김종섭 월간리뷰 발행인
  • 승인 2020.06.30 16: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문화투데이와 함께 한 강원도립극단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가 우리 시대에 던져주는 감동의 메시지
김종섭 월간리뷰 대표
김종섭 월간리뷰 대표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 같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세상 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또 다시 꿈 같도다. 또 다시 꿈 같도다.

 

막이 오르면 ‘희망가’가 흐른다. 인생은 ‘잘 살아도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는 듯, 희망 없는 ‘희망가’(希望歌)가 연극 ‘월화’(月華)의 비극적 종말을 암시한다. 2020 연극의 해 기념 특별공연으로 서울문화투데이와 함께 강원도립극단(이사장 우병렬)이 무대에 올린 ‘월화-신극, 달빛에 물들다’는 1920년대 한국 최초 여배우 중 비록 짧은 기간, 가장 인기가 많았던 여배우 ‘이월화’의 연기생활과, 연기인으로서 비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그린 감동적인 사회극이자 애정극이다.

강원도립극단과  <서울문화투데이>가 공동주최한 연극 월화의 음악감독인 이정표의 가야금 연주와 노래의 한 장면.(사진=강원도립극단).
강원도립극단과 <서울문화투데이>가 공동주최한 연극 월화의 음악감독인 이정표의 가야금 연주와 노래의 한 장면.(사진=강원도립극단).

감상하는 내내 최초 여배우로서의 ‘도전적 삶’에 대해 응원하고, ‘탁월한 연기력’에 대해 감동했으며, 서른살의 짧은 삶을 살면서 피할 수 없이 맞닥뜨려야 했던 수많은 ‘고초와 타락’에 대해 안타까워 했던 연극 ‘월화’(예술감독 김혁수, 디렉터 양정웅, 작가 한민규, 연출 이치민).연극이 끝난 후 누군가는 눈물을 훔쳤고, 누군가는 침묵의 강으로 슬픔을 떠내려 보냈다.

너무 시대를 앞서가면 탱자나무 투성이의 개척지를 보호장비 없이 생손으로 치우다가 죽음을 자초하는 것처럼 이월화의 삶이 그랬다.

강원도립극단과 <서울문화투데이>가 공동주최한 연극 월화의 한 장면.(사진=강원도립극단)

여성 배우가 존재할 수 없었던 신파극(新派劇)이 아직 청산되지 않은 시대적 흐름 속에서, 여성도 배우로 인정받을 수 있는 리얼리즘의 신극(新劇)에 뛰어들면서 부닥쳐야 하는 수많은 난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인지는 모르나, 이월화는 여배우를 배우로 인정해주지 않는 시대 풍조에 강한 반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 전의 삶이야 어찌되었든 월화는 유일하게 자신의 연기력을 인정해주는 ‘여명극단’에서 잠깐 빛을 받을 즈음, 일본인의 투자를 받아 급성장한 민중극단의 스카웃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여배우를 배우로 인정하지 않으면 극단의 제의를 거부하겠다는 말에 민중극단 윤백남 감독은 이 연극의 핵심 키워드 한 마디를 던진다.

세상이 여배우를 배우로 봐주지 않는다면, 네가 바꾸면 되는 것 아니야?”

당시 극판은 춤과 노래에 능한 기생들이 투입되던 시절인 만큼 ‘여배우란 곧 기생’이라는 이어동의(異語同意)였으니 월화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네가 세상을 바꿔보라’는 호통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예명을 지어주었다. 본시 본명은 이정숙이었지만 밝은 달이 세상을 비추듯 너의 연기로 세상을 비추라는 뜻으로 이월화(李月華)라 부른 것이다.

그러나 달빛에 대해 월화는 그 이중성을 독백한다.  ‘빛은 희망이기도 하고, 절망이기도 합니다.’  빛은 민중에게 연기를 통해 감동을 주고 시대의 흐름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기도 하지만, 그 빛으로 인해 누군가의 욕망에 불꽃을 일으켜 절망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복선이 아닐까? 그에게 천부적이었던 연기 재능은 ‘배우란 입이 아니라 행동으로 연기로 보여줘야 한다’는 윤백남 감독의 일갈에 자극을 받아 오디션에 참가하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강원도립극단과 <서울문화투데이>가 공동주최한 연극 월화의 한 장면. 주연 배우인 문수아(가운데).진=강원도립극단)

오디션 심사위원은 그녀의 연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눈치 챈 듯 묻는다. 기생 엄마가 자기를 위해 몸을 파는 것을 막기 위해 가위로 엄마의 치마를 찢었으며 머리빗을 버렸다는 대사를 읊으며 통곡할 때 ‘당신의 연기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 자기 삶을 투영한 것 아니냐’고 채근하는 것이다.

심사위원은 월화의 연기의 원천을 꿰뚫고 있었던 것일까? 월화에게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 자기 삶의 표현이라는 느낌이 전율처럼 객석까지 전해졌다. 유민영 연극평론가가 이번 연극의 주인공이자 실제 인물인 ‘월화’에 대해 평한 부분이 떠오른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은 것처럼 삶이 평탄하지 않고, 성공보다 실패가 많은 사람을 다룰 때 더 큰 감동을 준다'고 했다. 그러기에 그의 연기는 생살을 베는 고통처럼 핍진했으며 타들어가는 살내음이 진동하는 불꽃을 피우며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그 빛으로 인해 절망의 길도 드리워지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절대 사랑하지 않겠노라.’ 여성으로서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던 월화는 약혼녀까지 두고 있는 작가 박승호의 눈물겨운 구애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엄마가 기생을 했든, 사생아든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지금의 월화를 만든 밑거름’이라며 그토록 위로해주던 남자, 이 땅에 신극의 뿌리를 내리겠다며 ‘토월회’를 결성하면서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주었던 남자, 일본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윤백남에게 ‘연극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인데 어찌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지는가. 우리가 일본보다 못할 게 무엇이냐’며 질타했던 남자, ‘예술은 문화를 변화시키고, 문화는 나라를 변화시킨다’며 작가정신을 외쳤던 그 남자 박승호가 연극 ‘카츄사’ 상연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월화와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라며 배신을 때린 것이다. 월화는 졸지에 멀쩡한 남자를 유혹한 값싼 기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길은 희망의 빛이 꺼져버린 캄캄한 체념(諦念)의 긴 동굴로 들어선다.

강원도립극단과 <서울문화투데이>가 공동주최한 연극 월화의 한 장면.(사진=강원도립극단)

월화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여배우로서 뜨지 못하자 기생집을 운영할 수밖에 없던 친구 복혜숙에게 ‘배우란 고관대작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시대를 대변해야 하는 존재’라고 꾸짖었지만 그깟 사랑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무너져버린 월화는 복혜숙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은 저마다 정해진 운명이 있으며, 자기만의 삶이 있음을 인정하고 배우 역시 누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 대사에 객석은 격한 감동으로 모두가 호흡을 멈추고 말았다.

민중극단에서 제작한 영화 ‘월화의 맹서’ 시사회에서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받아들여야 하는 극중 여성의 역할에 대해 치욕적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일본인 투자자가 분노하면서 월화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일본인 투자자는 윤백남에게 제작비 회수를 요구하고, 그 돈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그 투자자에게 기생처럼 넘겨진 굴욕 끝에 일본인을 권총으로 사살한 후 은막을 떠나고 만다. 결국 먹고살기 위해 그토록 증오했던 ‘고깃덩어리’로서의 권번(券番)생활도 피하지 못하고 게다가 옛사랑의 그리움을 떨치지 못하는 이 비겁한 자아(自我)에 대해 괴로워하면서 서서히 죽어가면서 막을 내린다.

강원도립극단과 <서울문화투데이>가 공동주최한 연극 월화의 한 장면.(사진=강원도립극단)

이 연극에서 단연 돋보인 연기자는 역시 월화 역을 맡은 ‘문수아’가 아닌가 싶다. 극중 오디션에서의 열연(熱演)은 극중 심사위원들뿐만 아니라 객석 또한 눈물바다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초반 ‘커버’(갑작스럽게 대타로 투입되는 배우)로 등장할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작과 대사는 단지 연기가 아니라 실제 분노했으며, 1920년대로 회귀해 여배우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혀 한번 꼬이지 않고 어쩌면 그토록 긴 대사를 막힘없이 실제감 넘치게 소화해 낼수 있을까? 더불어 일본인 투자자 왕평렬의 악역을 분했던 박현철 역시 무대로 올라가 귓방망이를 휘두르고 싶을 만큼 밉상 연기를 실감니게 펼쳤다.

‘이 풍진 세상의’ 희망가에서부터 극중 배경음악을 가야금 연주와 함께 조용하고 구성지게 노래한 가야금 싱어송라이터 이정표(2020서울문화투데이 젊은예술가상 수상)는 월화의 도전적 기백, 불과 4년만에 ‘예원의 여왕’으로 등극하기까지의 영화로운 배우생활, 불륜남의 배신, 한낱 고깃덩어리 기생으로의 전락, 초라한 죽음 등 파란만장한 월화 인생의 '이정표'(里程標)들을 일이관지로 이어준 슬픔의 접착제였다.

연극이 끝난 후 배우들의 무대인사.(사진=강원도립극단)
연극이 끝난 후 배우들의 무대인사.(사진=강원도립극단)

이 무대를 위해 1년 동안 준비한 강원도립극단과 배우들의 땀 흘린 연기를, 냉방이 팡팡 돌아가는 객석에서 어찌 평하겠는가.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필발이 부족하기에 그저 좋은 공연 감상했노라 하고 감사인사를 드릴 뿐이다.

이런 귀한 공연에 대해 글 한줄 쓰게 해준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대표에게도 감사드리고 싶다. 참 좋은 공연, 언제 어디서 무대화해도 롱런 히트를 점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