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류의 예술로(路)] 아날로그 예술의 불안
[장석류의 예술로(路)] 아날로그 예술의 불안
  • 장석류 정동극장 차장/행정학 박사
  • 승인 2020.07.01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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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류 정동극장 차장/행정학 박사
▲장석류 정동극장 차장/행정학 박사

역사의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집으로 배달앱을 통해 음식주문을 하고, 넷플릭스를 보며 여가를 보내는 방식으로 삶의 양식 자체가 변하고 있다. 시공간의 좌표는 계속적으로 온라인 플랫폼과 디지털 인공지능의 힘이 커지는 방향으로 가고, 코로나 19를 맞아 아날로그 종사자들은 갈 곳을 잃고 시체더미처럼 쌓여가고 있다. 유튜브, 넷플릭스 등의 주가는 계속 오르지만 태양의 서커스는 회생을 위한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고, 국내외 공연장들은 문을 닫고 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미 시대는 변했는데, 정몽주의 단심가를 부르며 아날로그의 끝판왕인 공연장에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진다. 무대 위에서 빛나던 예술가들이 시들어가는 나무처럼 말라가는게 느껴진다. 공연이 끝나고 단비처럼 내리는 관객의 박수에 흠뻑 젖었을 때, 그들은 싱싱하게 살아있었다. 누군가에게 감동을 전한 뿌듯함이 공감될 때, 목소리는 상기되고 표정은 살아났다. 돈은 부족해도 영혼의 양식을 만들어 낸 자로서 자존감은 높았다. 그런데 요즘 예술가들의 언어는 울화가 쌓여 날카롭거나,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하는 망설임이 다분하다.

'불안'하다. 코로나 19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확실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균형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킨다. 눌려있는 압력솥이 부글부글 끓듯이 닫힌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영혼의 허기짐은 지난해 다녀온 여행기록, 좋아했던 음악앨범 등을 타임라인에 올리는 것으로 표출된다. 영혼의 갈증에서 나오는 서로의 목마름이 랜선을 타고, 공감버튼을 누르게 한다. 하지만 공감은 갈증의 공유이지 시원한 목마름까지 선사하진 못한다. 불꺼진 방안에서 넷플릭스도 볼만큼 봤다.

영혼을 채워주는 음식을 만들었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작년부터 대본을 썼고, 몇 달 동안 수십명이 함께 입을 맞추고, 동작을 맞추며 매일 10시간씩 연습해왔다. 어떤 이는 나의 ‘불안’과 ‘고독함’을 재료 삼아 악보를 해석하며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어, 다른 사람의 영혼을 따뜻하게 해주는 연주회를 준비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마음이 허기진 사람들은 공연을 예약하고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렸다. 거리두기로 절반만 좌석을 오픈했지만 대부분이 예매되었다. 공간 폐쇄라는 행정지침이 내려온 날, 예약 리스트에 있었던 마음 고픈 사람들에게 일일이 연락하여 오실 수 없다고 전했다. 영혼의 허기짐을 채워주기 위해 준비되었던 음식은 손도 대지 못하고 그대로 버려졌다. 이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행정이 예술을 만났을 때, ‘예술가의 불안’을 바라보는 행정인의 마음은 어떨까? 편차는 있겠지만 공직봉사동기에서 오는 ‘연민’이 있을 것이다. 행정은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제도적으로 해결해보려는 직업정체성을 기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예술가의 불안을 알고는 있으나, 함께 고통을 나누기 보다는 본능적으로 행정 자신을 방어하는 경우가 많다. 아날로그 성향이 강한 예술분야는 정책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예술가의 고통을 알지만, 간단히 공공문화시설의 문을 닫아버리는 의사결정은 행정의 자기방어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일 수 있다.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결국 행정인의 연민은 진정한 연민이 아닌 누군가의 고통을 보면서 나에게서 밀어내고 싶어 하는 연민일 수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초조한 마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진정한 연민이란,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

대형마트, 식당, 프랜차이즈 커피숍 등은 필수재로 인식되는 시장의 영역이다. 지하철 등 대중교통은 일상의 이동에 꼭 필요한 공공서비스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소는 불특정 다수를 통제하거나 관리하지 못한다. 그에 비해 공공문화시설의 경우 실명으로 참여자 관리가 가능하고, 예약부터 관람과정까지 물리적 공간을 방역으로 지켜낼 수 있는 최대치의 대응이 가능하다. 물론 아무도 해당 공간에 못 오게 하면 그 장소에서 전염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공의 공간에서 책임져야하는 일이 생기지 말아야 한다는 ‘행정의 불안’이 ‘예술의 불안’을 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바람 쐬러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연으로 나가고, 공연장이나 미술관에 간다. 물론 여행을 가고, 문화공간에 가는 것이 의식주처럼 매일 필요한 일상재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재화는 아니다. 인간은 입에 들어가는 밥으로만 살 수 없다. 자연을 여행하는 것도 필요하고, 직접 만나는 예술도 필요하다. 디지털 세상이 고도화될수록 그에 대한 반작용의 욕구도 강해질 것이다. 시대의 변곡점에서 예술이 온라인 플랫폼과 디지털 인공지능에 적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공공극장과 미술관, 박물관 등 사회적 산소를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숲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예술을 만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를 같이 고민하고 함께 견디며 극복하겠다는 연민이 더 필요한 때이다. ‘예술의 불안’을 안아주어야, ‘우리사회의 불안’을 예술이 안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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