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전위와 실험, 변방의 이단아들-2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전위와 실험, 변방의 이단아들-2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0.08.0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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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Ⅲ.
한국의 퍼포먼스를 논할 때, 자생적인 것이냐, 외국에서 도입된 것이냐 하는 논란이 일곤 한다. 물론 그 단초를 말한다면 서구로부터 유입된 것이 맞다. 그러나 196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해프닝(Happening)에 대해 언급할 때면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자생성이 강하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경우이다. 나는 이를 가리켜 우스개  소리로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았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는 물론 장점만을 노린 반농담조의 소리이다.

60년대 한국 해프닝의 기수인 정찬승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은 당시 해프닝이란 용어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 그 용어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신문사의 외신부 기자들이었다는 것이다. 해외 정보에 밝다보니 자연 해프닝을 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 전위미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김구림은 자신이 해프닝을 비롯한 서구 전위예술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은 해외의 잡지를 통해서였다고 말한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TIME’이나 ‘LIFE’와 같은 잡지를 통해 해외의 전위미술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1) 

정찬승이나 김구림의 증언은 한국의 해프닝을 논의할 때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당시 김구림은 서울의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 있던 해외미술서적을 파는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여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어에 익숙하지 못하다보니 도판을 위주로 보게 되었고,  그것이 오히려 독특한 해프닝의 형식을 낳는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가령, 한국의 해프닝에는 앨런 캐프로(Allen Kapraw)의 <여섯 파트로 이루어진 18개의 해프닝(18 Happenings in 6 Parts)>과 같은 칸막이식의 구조를 지닌 해프닝이 없었는데, 이는 한국의 독특한 해프닝의 성격을 말해주는 예이다.

▲김은미, 2007, 퍼포먼스, made in U.S.A gun(도판=윤진섭 제공)

1968년에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한강변의 타살>이나 1970년에 서울의 사직공원에서 열린 제4집단의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과 같은 일종의 사회적 고발의 성격을 지닌 해프닝들은 당시의 사회현실을 통렬히 풍자하거나 비판하였다.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 3인의 해프너가 벌인 전자는 당시 만연된 국전비리를 고발하는 전위적 형식의 해프닝이었으며, 비단 미술인들뿐만 아니라, 연극, 판토마임, 의상, 영화 등이 망라된 제4집단이 행한 거리해프닝인 후자 역시 사회를 고발하는 해프닝이었다. 이 해프닝에 참가한 멤버들은 거리 행진 중 경찰에 연행, 경범죄로 구류를 살고 이튿날 훈방되었다.2)

Ⅳ.

1970년대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언론 탄압과 인권의 유린이 자행되던 혹독한 시대였다. 김지하의 <오적> 사건이 말해주듯, 사회에 만연한 부정과 부조리는 성실히 살아가는 평범한 서민들에게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안겨주었다. 한편으로는 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 그 열매를 따먹는 시기였지만,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평화시장의  노동자인 전태일의 분신자살로 대변되는 이 시기 한국사회의 암울한 현실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서울시내의 상업화랑 수가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었던 미술계에서 첨단의 전위미술 형식인 이벤트(Event)를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무렵에는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상파울루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전에서 퍼포먼스가 강세였기 때문에 이를 의식한 한국의 작가들 사이에서 전위미술(avant-garde art)이 인기가 높았다. 

'Event‘란 이름의 퍼포먼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5년에 백록화랑에서 있었던 이건용의 발표에서 였다. 그는 <실내측정>과 <동일면적> 등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훗날 이건용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논리적 이벤트(Event Logical)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1년 앞선 1974년의 [S.T]그룹 정기전에서 성능경은 전시기간 동안 매일 동아일보 신문지를 벽에 부착한 후 기사를 오려내는 행위를 하였다. 신문이란 매체를 통해 검열의 문제를 제기한 성능경은 모더니즘 일변도의 미술계 상황에서 사회적 이슈를 다룬 작가였다. 그 만큼 이 시기에는 대다수의 작가들이 60년대의 해프닝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약한 사회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977년, 견지화랑에서 열린 [S.T]전에서 발표한 윤진섭의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We stroke)>은 80년대의 퍼포먼스를 예고한 놀이적 성격이 강한 유목적 이벤트였다. 관객참여를 시도한 이 퍼포먼스에서 윤진섭은 귀틀집을 짓거나 울타리를 만드는 등 삶의 문제를 행위를 통해 제시하였다.

각주)

1)김구림, <해프닝과 이벤트 :1960-70낸대 한국의 행위예술, ACC((Asia Culture Center) , 16-17쪽.
2)제4집단은 무체사상을 이념적 배경으로 삼아 김구림이 주도해 만든 토탈아트 지향의 전위단체였다. 회원은 미술의 정찬승, 연극의 방태수, 의상의 손일광, 판토마임의 고호, 영화의 이익태 등이다. 또한 이들은 대통령에서 ‘대’자를 뺀 통령(김구림), 부령(정창승) 등 정부조직을 풍자하는 직책을 설정하고 지방조직을 갖추는 등 당국을 자극하여 탄압을 받았으나 몇 달 못 가 스스로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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