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6.25전쟁과 신무용가 김민자
[성기숙의 문화읽기]6.25전쟁과 신무용가 김민자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0.08.2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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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의 삶 곳곳에 전쟁이 남긴 상흔은 넘쳐난다. 6.25전쟁! 올해도 어김없이 신무용가 김민자 선생을 떠올린다. 

무용가 김민자는 19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중국 상하이를 오가며 사업을 할 정도로 진취적인 분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던 모친의 영향으로 일찍이 신문화에 눈을 떴다. 김민자는 경기고녀 재학시절 최승희무용연구소에 입문했다. 1933년 스승 최승희를 따라 현해탄을 건너갔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모던댄스를 익혔다. 엘리아나 파블로바에게 발레도 배웠다. 

김민자의 초기 예술활동은 최승희의 춤파트너 역할로 집약된다. 장신(長身)인 최승희에 비해 아담한 체구를 지닌 김민자는 주로 2인무에서 여성역을 맡았다. 조택원과의 2인무에서는 ‘현대 일본 제일의 콤비’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조택원의 공연출연을 계기로 김민자는 스승 최승희와 차츰 멀어졌다. 최승희가 해외 공연을 떠난 후 도쿄에 남아 있던 김민자는 조택원의 출연제의를 받고 고심한다. 스승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택원 공연에 출연하여 무용수로서 명성은 얻었다. 그러나 스승 최승희와는 결별하는 운명을 맞는다. 

일제강점기 세계적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최승희·조택원과 한 무대에서 호흡을 맞춘 이는 김민자가 유일하다. 숙명의 라이벌 최승희·조택원이 동시에 탐낼 정도로 김민자는 출중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김민자는 최승희의 제1호 제자이며, 한국 최초의 전문무용수로 일컫어진다. 조선악극단, 예그린악극단에서 무용지도 및 안무를 통해 무용의 미학적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다. 

6.25전쟁을 기점으로 김민자의 삶은 두 동강났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고, 그로인해 삶의 의미도 잃었다. 예술활동의 원동력도 완전히 상실했다. 육신은 만신창이가 됐고 정신은 피폐해졌다. 김민자의 남편 김태철은 서울 출신으로 일본 동북제대 법과를 나온 최고 엘리트였다. 일본 유학 시절 김민자의 무용공연에 매료되어 수년간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변함없는 순정에 감동하여 김민자는 결혼을 결심한다. 결혼 직후 남편 김태철은 서울검찰청 소속 검사가 됐다. 창덕궁 옆 원서동의 99칸짜리 한옥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6.25전쟁으로 산산이 부숴졌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원서동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눈 앞에서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남편을 숨죽이고 지켜봐야 했다. 전시 상황에서 검사라는 지위는 즉석 총살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순간 피가 멎는 듯 했다. 그후 남편의 행방은 묘연했다. 북한으로 잡혀가는 것을 봤다는 얘기가 풍문으로 들렸다.  

극적인 순간도 있었다. 인민군협주단 공연공작대 일원으로 서울에 온 최승희의 딸 안성희와 가회동 최승희 선생 옛집에서 재회했다. 남편이 인민군에게 끌려간 후 피난 갈 엄두조차 나지 않던 김민자는 자신의 집을 떠나 스승의 옛집 지하실에 숨어 지냈다. 극적으로 상봉한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안성희는 도쿄 최승희무용연구소 시절 업어키웠기에 김민자와는 혈육과 다름없는 애틋한 사이였다.

안성희는 인민군협주단 공연공작대 활동 외에도 특별한 임무를 띠고 서울에 왔다고 털어놨다. 김민자를 공연공작대 일원으로 합류시켜 북으로 데려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최승희가 딸 안성희에게 직접 내린 임무였다. 김민자는 가열차게 거절했다. 후일 김민자는 당시 상황을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네 형부는 너희 인민군이 총으로 쏴 죽였다’고 고함을 쳤고, 성희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고 회고했다.                 

6.25전쟁 후 김민자는 한때 군예대(軍藝隊)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혹시 국군이 북진(北進)을 하게 되면 북으로 가서 남편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실낱 같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모든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 중 김민자는 스승 최승희의 뜻을 비켜갔다. 북으로 가는 대신 무용을 접고 불교에 귀의했다. 중년 이후 서울 종암동 산꼭대기에 위치한 영산법화사에서 40여년 간 불자(佛者)로 살았다. 그녀가 한국무용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음에도 다소 낯선 존재로 평가되는 것을 이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지난 2012년 김민자는 9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선생을 돌보던 사회복지사가 타계 소식을 전해줬다. 소식을 듣고 급히 영산법화사로 달려갔다. 옷이며 사진 등 선생이 남긴 유품 중 월간 『춤』지가 가장 도드라져 보였다. 선생이 살아생전 춤지 발행인 조동화 선생과 각별했음을 증거한다. 1960년대 후반 무용계 은퇴 후 불교에 귀의하여 은둔생활을 하면서도 조 선생과는 계속 인연을 이어갔다. 그 덕분에 필자도 선생과 인연이 닿았던 게다.

2000년 겨울 어느 날 조동화 선생이 쥐어 준 주소를 들고 성북구 종암경찰서 뒤편 산자락에 위치한 영산법화사를 찾아갔다. 김민자 선생이 기거하던 방은 소박하고 단촐했지만 온기가 느껴졌다. 한 쪽 벽면에 놓여진 낡은 책장 가득 가지런히 꽂혀 있던 춤지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후 겨울이면 빨간 내복과 카스테라를 사들고 영상산법화사를 방문했던 기억이 새롭다. 해를 거듭할수록 김민자 선생의 쇠잔해가는 모습에 인생무상을 느꼈다. 그리고 2012년 2월 그해 겨울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선생은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6.25전쟁!, 민족상잔의 비극은 무용가 김민자의 삶 전체를 망가뜨렸다.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올해 다시금 김민자 선생이 남긴 존재론적 의의를 되새긴다. 그는 일제강점기, 해방, 6.25전쟁을 관통하는 격동의 시기를 살다간 비운의 무용스타였다. 그러나 그가 한국무용사에 남긴 업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시인 정지용은 김민자의 춤에 대하여, “바람맞은 새매와 같은 매스러운 예풍(藝風)”을 높이 샀다. 바야흐로 일가를 이루려는 경계에 들어선 그녀의 춤을 호평했다. 새매 같은 예풍을 지닌 신무용가 김민자의 예술적 비상은 6.25전쟁으로 멈췄다. 한국무용사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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