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딱지 12회
[연재] 딱지 12회
  • 김준일 작가
  • 승인 2009.12.10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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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몽키 스빠나 (2)

에이, 에어는 그렇게 빼는 게 아녜요. 우리 아빠한테 맡기세요.

여덟 살짜리 찬홍이 녀석이 거만하게 말했다. 찬홍이 아빠는 낮잠을 자다가 나온 듯 부석부석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찬홍이 엄마와는 딴판으로 허여멀쑥하고 곱상하게 생긴 사내였다. 그 손에 팔뚝만 한 몽키 스패너가 들려 있었다.

여기 살자면 청계천에 나가 이런 몽키 스빠나 하나 사다 놔야 할 겁니다.

그러면서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 익숙하게 볼트를 풀기 시작했다.

 이윽고 쉭 하는 바람소리가 나더니 금방 이음새에서 물이 솟았다. 에어가 빠진 것이다. 다시 볼트를 조여 놓자 수도꼭지에서도 힘차게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미순은 찬홍이한테는 천 원짜리 한 장을 주고 그 아빠와 엄마한테는 유자차를 대접했다.

부탁도 안 했는데 당연한 일처럼 찾아와 도와 주는 이웃 인심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리고 찬홍이 엄마도 다시 보니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글래머 타입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마운 마음은 5분도 안 되어 싹 가시고 말았다. 찬홍이 녀석이 책장에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책을 뽑아 놓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부모는 말리기는커녕 그저 책을 가지고 노는 것이 신통하다는 듯이 흐뭇한 얼굴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우리 이웃간에 살게 됐는데 서로 인사나 하지요. 내 이름은 허준이라고 합니다.

찬홍이 아빠가 붙임성 있게 말했다.

읍내에 나가면 다홍치마라는 캬바레가 있는데 거기서 지배인을 하고 있지요.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캬바렙니다. 언제 틈이 나면 한번 놀러 오세요. 끝내 줄 테니까.

그들이 돌아간 다음 미순이 물었다.

허준이라면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 같지 않아요?
많이 들어 볼 수밖에. 동의보감을 쓴 사람이니까.
아 맞다!
아무래도 예명 같은데 캬바레하고는 영 어울리지 않는 걸.

그 이튿날 정구는 청계천에 나가 찬홍이네와 똑같은 몽키 스패너를 사 왔다. 이제 에어 빼는 문제만은 확실하게 해결을 본 셈이다.

무슨 큰일이라도 해치운 것처럼 개운하고 든든한 기분이었다. 그 찬홍이 아빠가 사흘 후에 다시 408호를 방문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에어 때문은 물론 아니고 사교적인 방문도 아니었다.

그는 새벽 두 시에 갑자기 쳐들어왔다. 자다 말고 나가 보았을 때 그는 내복차림으로 자기네 현관문이 열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도어핸들을 힘껏 틀어 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407호를 봉쇄한 채 구원을 청하기 위해 408호의 벨을 누른 것이다. 안에서는 찬홍이 엄마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삼봉이 너 빨리 안 들어와? 니까짓거 뛰어 봐야 벼룩이야. 좋은 말로 할 때 들어와서 다 털어 놓고 용서를 빌어. 안 그랬다간 너 진짜 초상날 줄 알아.
주무시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찬홍이 아빠는 다급하게 인사를 닦고 도어핸들을 놓자마자 408호로 뛰어들었다.

이어서 407호의 현관문이 벌컥 열리더니 분홍색 슈미즈 바람의 찬홍이 엄마가 나타났다.

 굵고 긴 목과 통나무 같은 팔뚝이 다 드러나서 그런지 낮에 볼 때보다 훨씬 더 커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몽키 스패너가 묵직하게 들려 있었다.

아이구, 이거 주무시는데 미안해서 어쩌나.

그녀는 얼른 몽키 스패너를 뒤로 감추고 한 손으로는 수박통 같은 젖가슴을 가렸다.

별일 아녜요. 어서 주무세요. 죄송해요.

그녀는 뒷걸음질을 하더니 급히 문을 닫았다. 그러나 주무시기는 이미 다 틀린 일이었다.

아까 들어서 짐작하셨겠지만 제 본명은 허삼봉입니다. 허준은 예명이지요.

정구의 바지와 와이셔츠를 얻어 입은 삼봉은 냉수를 한 컵 마신 다음 신세타령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407호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쉽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