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충무로야사] -정진우 감독과 한국 영화계-
[연재 충무로야사] -정진우 감독과 한국 영화계-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09.12.1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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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정진우 감독의 1989년작 '비극은 없다'
“누가 정진우 감독인데?!”

현장체험차 촬영장에 간 필자가 시나리오작가 김하림 군에게 무심코 던진 소리.

“저기 군용잠바 입은 사람!”

김 군은 영화촬영용 카메라를 중심으로 엉켜 있는 스태프와 연기자들 틈에서 암갈색 메가폰을 들고 뭐라고 고함치고 있는 20대 중반의 한 청년을 가리켰다.

순간 나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검게 그을린 얼굴,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 군바리처럼 짧게 깎은 머리. 게다가 군용 야전점퍼를 착용한 거친 모습이 정진우 감독의 이미지에 대한 나의 상상을 한꺼번에 뒤엎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은 ‘초우’, ‘초연’, ‘하숙생’ 등 청춘영화를 연출했을 법한 백면서생 같은 센티멘털하거나 로맨틱한 이미지의 느낌과는 너무나 거리감이 있었던 것이다.

쉴 사이 없이 촬영현장을 종횡무진 좌충우돌하고 있는 그의 액션(?)은 마치 TV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에서 먹이를 향해 광활한 초원을 전력질주하고 있는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같은 느낌으로 내 시야를 강렬하게 찔러왔기 때문이다.

촬영현장 분위기도 감미롭고 달콤한 청춘영화 촬영현장 분위기가 아닌 무슨 전쟁영화나 액션영화 촬영장처럼 숨막히는 긴박감이 출렁이고 있었다. 사실 내가 느낀 정 감독에 대한 이런 이미지나 뉘앙스는 전혀 그의 캐릭터와 무관하진 않았다.

후일담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영화감독 지망생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처음엔 감독 지망생이 아니라 연기자(배우) 지망생이었단다.

그는 ‘비무장지대’의 박상호 감독과 ‘돌무지’의 정창화 감독의 문하생으로, 영화계 입문하기 전에 실제로 영화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깡패나 강도 같은 거친 역할이었다. 그 자신에게도 그때 그 기억이 새로웠던지 지금도 강남 신사동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 가면 당시의 그 스틸들이 응접세트에 보란 듯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역동적으로 영화연출작업을 시작한 정진우 감독은 그때부터 현재까지 한국 영화사에 큰 획을 긋는 버팀목으로 건재하고 있다.

뉴웨이브니 앙가쥬망 영화니 뭐니 하는 잡다한 영화사조의 역류현상 속에서도 그는 한국 영화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될 투철한 독자적 영화관과 작가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혹자들은 그의 철통같은 소신을 개인적인 고집이나 아집으로 평가했지만 결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지금도 의연하게 영화인들의 복지와 향후 한국 영화계가 지향해야 할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절상되거나 격상되지는 못할 망정 감히 격하, 절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청춘영화 연출 이후 그의 영화사적 궤적을 탐문해보면 모든 것은 자명해진다. 그러나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그의 괄목할 만한 경력과 업적을 새삼스럽게 기술하고 싶지는 않다. 한국 영화의 세계화, 선진화를 위한 그의 역동적인 의지 미래와 오늘날 다각적인 면으로 현대화된 한국 영화계의 눈부신 발전이 그의 그러한 업적에 기초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로 동시녹음 시도, 칸ㆍ베를린ㆍ베네치아 등 국제영화제 한국 영화 참여 및 수상, 수출을 위한 사적?공적 시도와 성과는 영화인이라면 누구도 지나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초기 시절 진흥이사직을 맡아 임권택 감독의 ‘증언’, 이만희 감독의 ‘들국화는 피었는데’ 등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스펙터클한 대작영화 제작을 시도했으며, 또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직을 맡아 가난하고 척박한 영화계의 대변자 역할을 도맡았다.

그러기에 현재도 한국영화인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영화인들의 오늘과 내일의 복지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서술한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는 표범이나 야생마 같다는 표현이 언뜻 그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그때의 거칠고 맹렬한 야성이 오늘 한국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친 능력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은 단순히 필자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정리/조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