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음악계의 진정한 어른과 노욕(老欲)의 경계
[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음악계의 진정한 어른과 노욕(老欲)의 경계
  • 주재근/한양대학교 겸임교수
  • 승인 2020.11.19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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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근/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주재근/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어른답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 자못 생각나게 하는 요즘이다. 어른이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성숙해지는 존재라고 한다. 가을 낙엽이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는 것처럼 갈수록 우리 사회에서 존경할만한 어른을 보기가 힘들다. 

불가의 반니원경(般尼洹經)에는 “참으로 나쁜 마음 중에도 노욕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전한다. 노익장(老益壯)이라는 긍정적 의미의 중국 후한시대 마원의 일화도 있지만 늙어서 노욕(老欲)은 경계해야 할 대상임에는 분명하다. 식욕(食欲), 재물욕(財物欲), 수면욕(睡眠欲)과 더불어 색욕(色欲), 명예욕(名譽欲) 등 오욕(五欲)은 인간의 태생적 욕구라 한다. 인생의 마무리에 접어드는 시기에 재물욕과 명예욕의 정도가 지나치면 탐욕(貪欲)으로 비쳐지고 더 나아가면 노욕(老欲)의 종착역에서 인생을 마무리하게 된다.

노자의 도덕경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知足不辱),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않아(知止不殆) 이로써 장구할 수 있다.(可以長久)” 라고 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소속기관인 국립국악원은 서울 본원 이외에 전북 남원 소재 국립민속국악원(1992년 개원), 전남 진도 소재 국립남도국악원(2004년 개원), 부산 소재 국립부산국악원(2008년 개원) 등으로 확대되었다. 연주단원은 기획단원 포함 약 500여명이 있으며 행정직과 연구직등 직원 약200여명이 근무하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최대의 국립공연예술기관이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부러워 하는 이와같은 거대한 조직의 기틀을 잡고 초석을 놓은 주역은 단연 소남 이주환(李珠煥, 1909~1972)을 꼽을 수 있다. 이주환 선생님은 조선조 궁중음악기관인 장악원(掌樂院)의 기능을 이어받은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부원양성소(部員養成所)를 1931년에 졸업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이왕직아악부 양성소 출신들은 구왕궁아악부라는 명칭의 사설 조직을 만들어 궁중음악의 명맥을 이어가고자 하였으나 열악한 재정형편으로 해체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 음악업을 포기하거나 그나마 좀 나으면 이발소나 사진관을 겸업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미군이 서울에 주둔 하고 있을 무렵 월북작곡가인 김순남이 이들의 딱한 사정을 미8군 군악대장에게 알려주었다. 미국 군악대장은 천년의 고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의 음악이 궁금하기도 하여 아악부원이 있는 곳을 찾아와 사정 이야기도 듣고 음악 연주도 들었다. 그후 미군 군악대장이 이들 궁중음악의 명맥을 잇고 있는 악사들에게 조금은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당시 인기가 가장 높았던 생필품이 가득한 ‘레이션 박스’ 교환권 수백장을 주었다고 한다. 10여명 남짓된 아악부원들은 이 교환권을 팔아 현금화하여 부원수대로 나누자는 의견이 앞서 있었다.  

이때 이주환 선생이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면서 “이 돈이 각자 필요한 것은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어차피 어렵게 살고 있는 것, 이 돈을 국립국악원 설립하는데 공용자금으로 사용하면 더욱 값지지 않겠는가”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와같은 이주환 선생님의 의지에 십분 공감하고 국립기관으로서 국악원 설립 운동을 하였다.

1948년 8월 아악부원의 대표로 구왕궁아악부 국영안(國營案)의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으며 1950년 1월에 대통령령으로 국립국악원 직제가 공포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바로 개원을 하지 못하고 부산에 피란 온 아악부원은 부산 용두산공원 밑 구시립도서관과 동광초등학교 분교로 사용하던 목조 2층집의 2층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곳에서 1951년 4월 9일 아악사장 이주환이 문교부장관으로부터 국립국악원장 임명장을 받고 4월 10일 ‘국립국악원’으로 개원하였다. 

초대 원장에 취임한 이주환은 선생은 국립국악원이 안정되어 일정한 궤도에 오르자 후진양성의 뜻을 세우고 1954년 10월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초대소장을 겸직하였다. 

국립국악원과 국악사양성소 설립 바탕에는 가람 이병기선생과 함께 결성한 1946년의 시조연구회였다. 시조강습회를 통하여 인연이 된 사회 각계지도층에게 전통음악의 가치와 국립기관과 교육기관 필요성을 사상교육을 하였던 것이 큰 힘이 된 것이다.

이주환 선생님은 인생의 황금기이자 절정기였던 1961년 한창 일할 나이인 52세에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자 국립국악원장과 국악사양성소 소장직을 스스로 물러 났다. 

이후에는 민간국악애호가 단체인 한국정악원 등을 이끌며 국악의 저변확대에 봉사하다 1972년 평생 국악의 길을 마무리하였다.       

만약 이주환 선생님이 개인적 사심이 있었다면 계속해서 많은 일들을 했을 것이고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후배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자신이 노욕(老欲)과 탐욕(貪欲)의 길로 갈 것임을 미리 알았던 것이다.

장자(莊子)는 `노욕은 몰락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버릇이 고쳐지는 무서운 병'이라 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종교를 넘어 사회 원로로 아직도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 우리 음악계에도 이주환 선생님과 같은 그 숭고한 뜻과 열정, 그리고 어른으로서의 처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국악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보았던 그 멋진 세계가 미래에는 더욱 더 좋은 환경에서 꿈꾸고 자라나기를 바라는 큰 어른들이 더욱 더 많아지기를 고대해 본다.

불교경전 중에 하나인 우다나바르카에 의하면 “하는 일 없이 그저 세월가는 데로 나이만 먹었다면 그는 어른이 아니라 어리석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이 성공의 의미를 이야기한 시중에 “한뙤기의 작은 정원을 가꾸든지 사회적 환경을 바꾸든지 간에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드는 것 당신이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 질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성공의 의미다”라는 말이 있다. 후배, 후학들과 그 가족들이 음악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행복해 질 수 있게 진정한 성공을 하고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데 노욕(老欲)의 경계가 어디일지.

내 자신이 노욕과 탐욕의 어리석은 늙은이가 되지 않고 진정한 어른으로서 내 인생의 종착 지점을 맞이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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