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이승택, 전위미술에 바친 일생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이승택, 전위미술에 바친 일생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0.12.1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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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이승택(1932~)은 함경남도 고원 출신으로 해방 후 중학교에 다닐 때 김일성 동상을 제작한 경험이 있다. 유년시절부터 유달리 손재주가 좋아 그림과 조각에 능했는데, 하루는 소문을 들은 군 인민위원회가 김일성 동상 제작을 의뢰했다. 대상을 보고 똑같이 만드는 재주는 있었지만, 큰 등신대 조각상을 만든 경험이 부족했던 그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뒤 마침내 멋진 동상을 완성했다. ''야! 이게 정말 동무가 만든 것이오?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구만 기레!'' 기대하던 동상을 본 인민위원장은 연신 감탄을 거듭하면서 수고 많았다며 중학생에겐 분에 넘치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 이승택 소년은 돈을 받자마자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드렸다. 

이승택은 6.25가 나자 어머니를 북에 남겨놓은 채 월남을 했다. 전쟁 중에 온갖 신산을 겪은 그는 휴전후인 1955년 홍익대가 종로구 누상동 화신백화점 뒤에 있던 시절에 조각과에 입학을 했다. 거기서 김경승, 윤효중, 김환기, 이경성을 만나 미술 실기와 이론을 배웠다. 1959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정식 직업을 갖지않고 동상조각을 하며 전위미술에  빠져들었다.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제작에 참여한 이후 수많은 동상과 조형물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남이 한 것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닌 이승택에겐 독특한 '거꾸로'의 철학이 있다. 뭐든지 거꾸로 보고 거꾸로 생각한다는 고유의 전위 사상이다. 그것이 70년 작가생활을 하게 한 원동력이다. 손재주가 좋아 평생 동상조각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니 남의 눈치 볼 필요없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재야 전위미술가의 표본으로서 이승택의 이미지는 그렇게 구축되었다. 검정색 인공기를 태극기와 함께 건다거나 과장된 남여 성기를 그리고 만드는 등, 사회적 금기와 통념에 저항하면서 불온과 외설에 가까운 작품들을 오브제와 설치, 퍼포먼스로 종휭무진 풀어온 그의 작가적 삶은 급기야 영국 테이트 모던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등 날이 갈수록 세계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적인 전시기획자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가 인터뷰한 기사가 플래시 아트(Flash Art)'에 실리는가 하면, Art Asia Pacific지는 표지에 이승택 작품이 실린 특집을 대대적으로 꾸몄다. 

오늘날 이승택이 국제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독특한 그의 '거꾸로' 철학 때문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전위미술(avant-garde art)을 외곬으로 추구한 것도 주효 했다. 만일 그가 평생토록 동상조각과 조형물 제작에만 빠져지냈다면 오늘날 '한국 전위미술의 선구자', ''비조각'과 '반예술'의 기수'라는 영광된 칭호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택의 고집스런 작가적 삶은 작가를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무언의 교훈이 돼 준다. 

이승택의 예술과 삶에서 후배들이 본받아야 할 점은 무엇보다  일관성이다. 작가로서 출발점에 섰던 최초의 방향과 태도가 인생의 종반부에 해당하는 현재에 이르기 까지 약 70년 동안 초지일관 유지돼 왔다. 이 삶의 항상성이야말로 오늘날 이승택 예술의 대미를 장엄하고 아름답게 장식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다. 

▲이승택 작가와 윤진섭 미술 평론가
▲이승택 작가와 윤진섭 미술 평론가

두 번째로는 경제적 자립이다. 만일 이승택이 원만한 생계유지를 이유로 안정된 직장에 취직을 했더라면 어쩌면 지금쯤 필부필부의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승택은 대학에서 시간강사의 신분으로 후학들을 가르친 적은 있지만 전임이 된 적은 없었다. 그 대신 그는 동상조각과 조형물 제작이라는 비정규직을 택했는데, 이러한 직업이 지닌 불안정성은 자연히 벼랑 끝을 걷는 것과 같은 심리적 위기감과 불안감을 조성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배태된 긴장감은 자구책으로 동상조각과 조형물 제작에 투신하는 한편, 그 반대급부로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이 원하는 전위작업에 매진케 하는 동력이 되었다. 

1950 년대 후반 이후, 약 70년에 걸친 이승택의 삶과 예술은 한국 전위미술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 장으로서의 독자성을 지닌다. 그는 예술의 경계를 넓히고 개념을 확장하는 작업에 평생을 걸고 몰두해 왔다. 90세의 노경에 이른 나이에도 작품 이야기만 하면 이승택의 눈은 유난히 반짝거린다. 작업은 그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전위, 즉 남을 앞서가는 일은 고행적 삶이다. 무수히 밀려오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수행적 삶이 전위작가의 생애인 것이다. 50년대 후반, 앵포르멜을 비롯한 수많은 전위미술의 사조들이 이 땅 위에서 명멸했지만, 한눈 팔지 않고 올곧게 외길을 간 전위작가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이승택은 30년대 생 전위작가로서는 가장 고령이며 최전방에 위치해 있다. 그런 그가 지난 11월 30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회고전을 열고 있다. 저항과 도전의 정신으로 무장, 고난의 시기를 극복하고 예술의 새 길을 개척한 공로자에게 헌정된 최고로 영광된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이 자리를 빌어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