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65년생 ‘김부장의 죽음’, 70분 오페라에 담기다
[리뷰]65년생 ‘김부장의 죽음’, 70분 오페라에 담기다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1.04.16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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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재해석
대본 신영선, 작곡 오예승, 지휘 정주현, 연출 정선영 참여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그대 살아 있는동안 빛나기를. 삶에 고통받지 않기를. 인생은 찰나와도 같으며, 시간은 모든것을 앗아갈테니.”

오페라 <김부장의 죽음>은 세이킬로스가 에우테르페라는 여성(아내 혹은 어머니)을 추모하며 지은 비문으로 막이 오른다.

▲오페라 ‘김부장의 죽음’ 공연 모습(제공=예술의전당)
▲오페라 ‘김부장의 죽음’ 공연 모습(제공=예술의전당)

‘65년생 김부장’의 삶이 끝나는 순간, 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평범한 ‘이반 일리치’를 조건에 맞춰 결혼하고 1남 1녀를 낳아 가정을 이루며, 승진을 위해 상사에 아부도 불사하는 우리 시대 ‘흔한’ 65년생 김영호로 그려냈다. 

<김부장의 죽음>은 이런 현실적인 장면들을 극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블랙 코미디적 요소를 활용했다. 가부장적인 남편과 바가지 긁는 아내, 무신경한 딸과 아들은 서로에게 불만이 많지만 한강뷰 아파트 하나로 모든 갈등은 사라진다. 

▲오페라 ‘김부장의 죽음’ 공연 모습(제공=예술의전당)
▲오페라 ‘김부장의 죽음’ 공연 모습(제공=예술의전당)

김부장은 회사일에 바빠 점차 가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점차 아이들은 아버지를 피했고, 아내는 그를 돈 버는 기계처럼 대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불의의 사고로 병석에 눕고 급기야는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작품은 김부장이 살아온 삶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을 함께 그려내지만,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결국 김부장과 김부장의 죽음이 있다. 김부장이라는 대한민국의 흔한 중년 남성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닌, 평범한 삶이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택했다. 김부장을 둘러싼 인간 유형을 보여주고, 누구나 겪을 법한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직접 사유하게 만든 것이다.

▲오페라 ‘김부장의 죽음’ 공연 모습(제공=예술의전당)
▲오페라 ‘김부장의 죽음’ 공연 모습(제공=예술의전당)

김부장은 꽤 많이 늦었지만, 완전히 늦지 않은 순간에 죽음에 대한 진리를 가까스로 깨닫는다. 그는 이른 죽음에 대한 부정과 분노와 억울함을 넘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한 명의 깨달음이 전체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김부장의 깨달음은 죽음과 함께 묻혀버리고 남은 이들은 죽은 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어리석은 고통의 삶을 또다시 살아간다.

이는 극중 사건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진행시키지 않은 점에서 더욱 부각된다.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기준으로 봤을 때, 그가 죽고 난 후, 즉 미래의 이야기가 극 중에는 선행되어 보이고 그보다 과거의 사건인 김부장의 죽음이 더 나중에 배치돼 있다. 

▲오페라 ‘김부장의 죽음’ 공연 모습(제공=예술의전당)
▲오페라 ‘김부장의 죽음’ 공연 모습(제공=예술의전당)

소극장 오페라로 제작된 <김부장의 죽음>은 연극적 상상력에 오페라가 선사하는 음악적 요소를 효과적으로 구현하려 노력했다. 다만 무대 전환에 있어 잦은 암전이 극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끊어 아쉬움을 남겼다. 장면과 장면 사이를 잇는 소리 등을 활용해 관객의 ‘극적 환상’을 단절시키는 요소 제거가 필요할 듯싶다.

그럼에도 대극장에서는 표현되지 않을, ‘소극장 오페라’만이 갖는 가능성은 무한하다. <김부장의 죽음>이 증명하듯 인간에 대해, 또 자신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라면 소극장의 매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1999년 시작된 이후 120여 개의 민간 오페라 단체가 참여해 온 22년 전통의 소극장오페라축제는 오페라 관객의 저변 확대와 창작오페라 발굴ㆍ육성을 목표로 20일 동안 총 22회의 공연을 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장수동 예술감독, 이강호 제작감독, 양진모 음악감독 등 오페라계의 베테랑 감독들이 사령탑을 이룬 가운데 펼쳐질 이번 축제에는 3편의 창작오페라와 2편의 번안오페라를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진행된 오페라 ‘김부장의 죽음’ 무대 모습(제공=예술의전당)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진행된 오페라 ‘김부장의 죽음’ 무대 모습(제공=예술의전당)

성악가의 대사와 노래를 어려운 외국어로 들어야 했던 기존의 오페라와 달리, 이번 소극장오페라축제 작품들은 100% 우리말 오페라로 구성된다. 창작오페라뿐 아니라 외국 번안오페라 작품 2편도 우리말로 공연된다.

우리 창작오페라로는 오예승 작곡 <김부장의 죽음>, 최우정 작곡 <달이 물로 걸어오듯>, 나실인 작곡의 <춘향탈옥>이 공연되며, 번안오페라로는 도니제티(G. Donizetti) 작곡 <엄마 만세>, 바일(K. Weill) 작곡의 <서푼짜리 오페라>가 공연된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 중인 젊은 오페라 연출가들의 예술적 아이디어와 참신한 지휘자들의 음악적 해석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줄 한국소극장오페라축제의 공연은 4월 한 달간 총 5개의 작품이 번갈아 5회씩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