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춤의 꽃을 여전히 피워올리는 수당 정명숙 선생
[발행인 칼럼] 춤의 꽃을 여전히 피워올리는 수당 정명숙 선생
  • 이은영
  • 승인 2021.04.19 14: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보유자
구순 바라보는 나이에도 흔들림 없는 호흡, 흐트러지지 않는 춤사위, 관객들 연이은 박수로 존경심 표해
이은영 서울문화투데이 발행인 겸 대표기자
이은영 서울문화투데이 발행인 겸 대표기자

춤이 끝나기도 전에 객석에서는 연신 박수가 터져나왔다. 오페라도 아닌 무용공연에서 이런 장면은 보기 힘든일이었다. 그에 화답하듯 무대 위의 춤사위는 몰아(沒我) 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는 수당 정명숙 선생(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보유자)이 지난 달 19일 크라운해태 남산국악당에서 올려진 '한국예인열전' 무대에서였다.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고 처음으로 접하는 그의 공연은 이전보다 춤에 자신감과 신명이 넘쳤으며, 보는 이들에게 그것은 고스란히 전달됐다.

정(精)·중(中)·동(動)의 물흐르듯 이어지는 춤사위에는 내재된 에너지가 한 디딤 한 디딤, 어김없이 실렸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꼿꼿한 자세로 흔들림 없는 호흡, 흐트러지지 않는 춤사위는 관객들의 감탄을 절로 나게 했다. 특히 정(精)의 절제된 춤사위에서 나오는 울림은 심연의 깊은 곳까지 닿았다. 함께 무대에선 수십 년 젊은 무용수들을 압도하며 자유로이 구사하는 춤사위에서 청춘이 만발했다.

수당 선생의 공연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필자가 처음 우봉 이매방 선생의 춤을 감동적으로 접했던 23년 전의 모습과 데자뷔 된다. 우봉 선생이 남산골한옥마을 개관 축하공연에서 펼쳤던 살풀이춤은 젊은 날의 우봉에게 사사한 수당의 춤에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일평생 우봉 선생의 춤을 잇고자한 일념으로 전수조교에 머문 시간만 삼십 년의 세월이었다. 늦게서야 보유자로 빛을 보게 됐지만, 수당 선생의 이날 무대를 보니, 좀 과장하자면 앞으로 100년도 더 넘어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다.

선생은 그 옛날 대구의 명문인 경북여고를 졸업한 수재이기도 하다. 그의 영민함은 전통춤(살풀이춤)에서 요구되는 정확하고 섬세한 춤사위를 재연해낸다. 타고난 감수성과 자태는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교태미가 흐른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 '정중동, 동중정'의 응축된 감정이 절제의 미학으로 높은 경지의 춤을 구현한다.

무형문화재 제97호 이매방류 살풀이춤 보유자인 수당 정명숙 선생의 살풀이춤 무대.
무형문화재 제97호 이매방류 살풀이춤 보유자인 수당 정명숙 선생의 살풀이춤 무대.

여전히 단아한 모습의 수당 선생은 여고 시절 무용을 시작해 국립무용단 1기생으로 입단한 후, 전통춤의 가락을 이해하기 위해 음악 전반을 배웠다. 가야금을 배운 덕분에 춤을 추기 위한 장단이 더 잘 보였다고 한다. 가야금 외에도 당대의 명인들을 찾아다니며 북, 장구 등을 개인수업을 통해 사사했다. 오로지 춤을 위해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아낌없이 탕진(?)했다. 그 덕분에 춤에 대해서는 남에게 가르칠 수 있을 만큼 많이 배웠다고 자부한다.

선생은 수 년 전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제7회 문화대상 무용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에 그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살풀이춤을 통해 삶의 깊이를 배웠고, '춤이 삶이자 삶의 의미'”라며 진정한 춤꾼의 면모를 보였다. 수당 선생의 우리 전통춤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바로 '그의 삶, 그 자체'다.

선생은 “자기 자신이 무대에서 춤을 추면서 몸으로 말하고 관객에게 감흥을 줘야 하는 것이다. 이론이 아니라 무대에서 모든 것을 보여야 한다”라고 했다. 이렇듯 그는 정확한 춤을 공식에 의해 기계적으로 추는 것이 아닌, 관객에게 춤의 정수를 전달하고, 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여긴다. 그의 무대는 이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선생의 무대를 보며 관객들이 그에게 끊임없는 박수로 찬사를 넘어 존경을 보내는 이유다.

무형문화재 제97호 이매방류 살풀이춤 보유자인 수당 정명숙 선생의 살풀이춤 무대.
무형문화재 제97호 이매방류 살풀이춤 보유자인 수당 정명숙 선생의 살풀이춤 무대.

그런데 이날 공연의 전체 공연을 보면서, 선생은 앞으로 절대 이런 무대에 서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무형문화재인 선생의 격에 맞지 않는 무대였다. 각 공연의 수준이 고르지 못 할 뿐만 아니라 진행과정도 불투명하고 매끄럽지 못한 기획공연이었다. 평생을 춤꾼으로 살아 오다보니 주변부의 사람들과 쌓아온 정리에 이끌려 초대에 응했으리라. 그러나 앞으로 무형문화재로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사로운 공연 초대는 단호히 거절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전통무용 공연에서 이렇게 박수가 끊임없이 나오는 공연을 본다는 것은 관객들에게는 무한한 행복감을 가져다 준다. 스스로 춤밖에 모르는 바보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수당 정명숙 선생. 살풀이춤 한 길을 위해 고독하고 외롭지만 묵묵히 견뎌왔다. 전통춤꾼의 근본을 지켜온 그가 '국가무형문화재 왕관'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