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풍금소리를 아시나요?
추억의 풍금소리를 아시나요?
  • 박솔빈 기자
  • 승인 2009.12.23 16: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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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시인과 화가 -풍금카페>, 변영아 시인과 풍금

풍금. 그것은 추억의 악기다. 일명 '피아노세대'인 20대 이하의 사람들에겐 생소한 이름, 풍금은 발판(페달)을 밟아 공기를 모아 리드(떨림판)를 떨게해야 소리가 나기 때문에 바람악기라는 뜻으로 풍금이라 불려졌다.

인사동 뒷골목, 종로경찰서 주차장 옆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지리산이라는 두부집이 나오고 그 곳을 지나 죽 들어가면 막다른 골목 직전 왼쪽에 작은 카페가 나온다. ‘시인과 화가 풍금카페(이하 풍금카페)'라고 적힌 작은 간판을 모르고 지나친다면 막다른 골목을 마주치고 만다.

‘5시 이후에 문을 엽니다’라고 쓰여진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치 다른 세상에 와있는 듯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손님하나 없는 내부에는 낡은 카세트가 옛 노래를 토해내고 있었다.

한 귀퉁이의 남김도 없이 온 벽을 가득 메운 시와 낙서와 붓글씨와 사진들. 멍청히 서 있자 주방에서 나온 변영아 시인이 말을 건냈다. “어서 와요.”


풍금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변시인은 한국문인협회에 회원으로 시집 ‘가슴 속에 묻고 사는 그리움’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녀는 검은 색안경에 빨간 옷을 입고 풍금 앞에 앉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나이든 몸체, ‘추억의 풍금’이라 꼬깃꼬깃 붙여진 종이조각, 추억의 가곡 리스트가 담긴 중학교 교과서... 영화 ‘내 마음속의 풍금’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다.

시인은 페달을 밟아 가곡을 연주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풍금소리는 뭐랄까, 간지러웠다. 피아노처럼 끊어지는 음이 아닌 가늘게 이어지는 음이 가슴 속을 간지럽게 했다.

문학계의 원로 古구상시인, 작사가 반야월 선생, 원로영화감독 古유현목 감독 등 문화예술계의 인물들이 문지방 닳도록 드나들었다는 풍금카페의 벽면에는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의 흔적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금의 귀천자리에서 95년부터. 중간에 7년 쉬었다가 다시 연지는 3년 됐지. 건물 주인이 가게를 내놔서 내년 2월엔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돼. 그럼 이 모든 추억이 사라지는 거지. 이런 카페는 인사동에서 밖에 못해. 다른 데는 죄다 피아노지... 근데 인사동 집값이 워낙에 비싸서 어쩔 수 없어.”

곳곳에 붙어있는 시인들의 시, 화가들의 그림. 구석에 있는 냉장고에까지 붙어있는 그 추억을 돌아보며 변시인은 울적하게 말했다.

그녀는 메마른 도시인들에게 어린시절의 향수를 불어넣기 위해 이 카페를 차렸다. 책가방도 없이 보자기에 책과 도시락을 싸 산길 들길 30리 길을 걸었던 옛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다는 변시인. 하지만 현실은 팍팍했다.

“가장 아쉬운 건 풍금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저 많은 문화예술인들의 흔적... 저 벽에 그림이나 시들은 다 없어지는 거지. 지키고 싶어도 시인이 무슨 능력이 있나. 생각같아서는 풍금소리 언제까지나 들려주고 싶은데 경제적인 이유로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게 가슴 아프지. 이제 더는 풍금을 들려줄 자리가 없어.”

오후 6시가 되자 손님이 들기 시작했다. 주로 나이 지긋하신 신사분들이었다. 손님들은 대부분 “아이구, 누님!”이나 “오랜만입니다, 누님”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문화ㆍ예술인들의 추억이 가득한 벽면
▲풍금을 연주하는 변영아 시인(왼쪽)과 노래하는 오상훈 교수

 

 

 

 

 

 

분위기가 무르익자 풍금 연주가 시작됐다. 변시인이 뜸부기로 운을 떼자 신청곡이 줄을 이었다. 이별의 노래, 바위고개, 오가며 그 집 앞을... 기자는 들어보지 못한 옛 가곡들이 흘러나왔다.

분위기에 젖고 추억에 젖어 노래부르던 손님이 말했다.

“옛날에 원조 받을 때 나던 소리야, 저 풍금소리가. 피난내려올 때 그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풍금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벅차. 내가 노래를 못부르는 게 아니고 가슴이 벅차서 노래가 잘 안나오는거야.”

경희대 행정학과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오상훈 교수도 풍금카페의 단골이다.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쉼터가 없어진다니 안타까워요. 서울시는 보여주기 위한 도시만 만들잖아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화와 시대의 정신은 누가 보존하는지...”

풍금은 옛날 악기다. 연주하는 곡들도 대부분 옛날 곡들이라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찬양하는 모차르트, 베토벤, 피카소, 고흐... 시대의 역작들도 이미 옛것이 된지 오래다. 예술은 나이를 먹을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시인의 시와 화가의 그림, 풍금의 노래를 먹고 자란 풍금카페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보지 못하는 먼 훗날, 우리는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서울문화투데이 박솔빈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