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 임춘앵과 임천수
[윤중강의 뮤지컬레터] 임춘앵과 임천수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1.05.1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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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국악과 뮤지컬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임춘앵과 임천수를 많이 알길 바란다. 임춘앵은 좀 알아도, 임천수를 아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임천수(1919~1985)가 오빠요, 임춘앵(1923~1975)이 동생이다. ‘여성국극’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은 남역(男役)은 단연 임춘앵이다. ‘임춘앵과 그 일행’의 여성국극이 크게 성공할 수 있도록 조력한 인물이 임천수이다. 임춘앵의 언니는 임유앵 (1913~1966)으로 판소리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단가 ‘호남가’는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려 하고” 이렇게 시작한다. 이들의 고향이 함평이다. 전라도에서도 외지에서 출생한 이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큰 역할을 남겼다.

임천수는 일본으로 유학을 해서, 제대로 클래식 성악을 배웠고, 임유앵과 임춘앵자매는 일제강점기 창극단체를 통해서 입지를 굳혔다.

여성국극이 탄생한 배경에 ‘여성국악동지회’(1948)가 있다. 박록주가 회장, 임유앵과 김연수가 부회장을 맡았다. 첫 작품 ‘춘향전’을 각색한 옥중화(1948)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듬에 공연한 햇님과 달님(1949)은 크게 히트를 한다. 이 때부터 십여년간은 대한민국에서 여성국극은 최고의 흥행공연이었다.

한국의 여성국극은 일본의 다카라즈카(寶塚)와 비교된다. 둘 다 무대에 여성만이 등장을 하고, 남성역할을 하는 여성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여성국극을 보다 체계적인 공연장르로 정착시키는데 임천수의 역할이 컸다. 한국전쟁기인 1952년, 부산에서 여성국극의 인력을 양성한 교육기관이 만들어진다. (부산시 영도구 대교로 1가 5번지) 남매는 의기투합해서, 한 장소에서 교육을 시작한다. ‘임춘앵무용국악연구소’와 임천수의 ‘대한국보여성예술단’가 만들어진다.

임천수의 꿈은 오직 하나였다! “일본에 보총(寶塚)이 있다면, 한국에 국보(國寶)가 있다.” 그는 평생 ‘국보’라는 이름으로 공연활동을 계속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이들은 서울에서 ‘국보여성예술연구소’(1954)를 설립한다.(서울 중구 쌍림동 22의 14) ‘한국의 고전악(古典樂)과 무용’을 새롭게 발전시키겠다는 꿈이 있었고, 국악은 임춘앵, 양악은 임천수가 담당했다.

1958년은 임춘앵이 여성국극의 배우가 된지 10년이었다. ‘임춘앵양 무대생활 10주년 기념공연’의 작품으로 ‘견우와 직녀’가 공연되었다. (1958. 3. 31. 시공관) 차범석 희곡을 바탕으로 임천수가 ‘여성국극’ 대본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임천수의 활약은 대단했고, 기존의 여성국극과 확연하게 차별화된 작품이었다. 당시로선 가장 첨단(尖端)의 무대로 큰 화제가 되었고, 타 장르의 공연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빠르게 변화하는 무대, 화려한 색감의 조명, 입체음향효과를 살린 대사가 삼박자를 이뤘다. 무선마이크를 제대로 사용해서 배우들의 동선과 춤을 제대로 살린 작품이 ‘견우와 직녀’이고, 이런 작품을 탄생시킨 주인공이 임천수이다.

임천수는 정통 테너였다. 일본 유학을 한 후 귀국해서 ‘신진 테너’로 각광을 받았다. 첫번째 독창회는 국도극장에서 열렸다. (1947. 11. 23) 그는 여기서 서양 성악곡도 불렀지만, 초점은 시조, 민요에 맞춰졌다. 한국의 전통적인 선율을 서양음악속에 살려내려 한 것이다. 서양악기로 반주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고, 당시 구왕궁아악부 (전 이왕직아악부, 현 국립국악원) 악사까지 동원을 해서, 그의 예술적 지향을 확실하게 알렸다. 해방 이후, 당시에도 많은 독주회와 독창회가 있었지만, 동서양음악의 융합적 측면에서 보면 임천수의 첫 번째 독창회가 가장 획기적이다.

두번째 독창회에선 더욱 완성도를 높은 공연이었다. 당시 을지로 입구에 있었던 민속극장 ‘원각사’에서 공연했다. (1959. 09. 09) 1부 외국성악을 소개했고, 2부는 클래식과 국악의 만남이었다. 판소리에 뿌리를 두고 본인이 작곡한 가극 ‘춘향전’이 오페라 아리아 형태로 소개되었다. ‘광한루 천중가절’ ‘니 그른 내력’ ‘농부가’와 함께, ‘진도아리랑’이 국악과 양악의 만남으로 소개되었다. 임천수의 음악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소프라노 김자경(1917 ~ 1999)과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1904~1974)으로 찬조출연을 했다.

공연은 호평 일색이었다. 작곡가 이흥렬(1909 ~ 1980)은 “민속음악의 새 스타일”이라는 리뷰를 남겼다. “양악인(洋樂人)으로서 국악을 현대음악화(現代音樂化)시키보겠다는 군(君)의 줄기찬 정열은 이번 독창회를 통하여 흐뭇하게 발현되었다. 특히 국악의 현대화 문제는 우리 악계(樂界)의 큰 과제인바 이 난제(難題)를 과감히 시도해 본 것에 대하여 의의(意義)를 발견한다”라고 하면서, “현대국악으로 양악과 우리 음악의 좋은 대조가 되어서 애치(異彩)를 띠었”다고 평했다. (1959. 9. 27. 동아일보)

판소리 ‘춘향가’을 소재로 해서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오페라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으로 현제명(1903~1960)의 춘향전이 있다. 이 작품은 지금도 얘기된다. 임천수도 ‘민족오페라’라는 이름으로 춘향전을 만들었다. 전통음악에 충실하면서 오페라를 지향한 춘향전은 단연 임천수의 작품이다. 임천수는 이후 ‘코리아민속가무단’을 만들어서, 국악과 양약을 통합하면서 한국적인 오페라를 만들고자 애를 썼다.

1960년대 이후, 임천수의 가장 큰 음악적 성과는 국보소녀가무단이다. 선명회(월드비전선명회합창단)를 알고, 리틀엔젤스를 안다면, 국보소녀가무단을 알아야 한다. 민간단체로 특별히 지원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오래도록 한 단체를 유지했다는 것은 매우 경이로운 일이다. 임천수의 두 딸은 한 때 ‘국보소녀’(임경희, 임성희)로 활동을 했다. 그들이 부른 노래 중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선율을 당시 대중들의 취향에 맞춘 곡들이 있다.

해방이후, 한국적인 공연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들에 대해서 여러 기록이 있다. 비교컨대 예그린뮤지컬에 주목하는 것처럼, 그 이전부터 이런 시도를 체계적으로 해왔고 당시 매우 획기적이었던 임천수의 예술적 노력과 성과에 대해서, 나를 포함한 이 시대의 공연분야 종사자들은 더 깊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