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를레앙 허의 '재밌게 공연보기'
오를레앙 허의 '재밌게 공연보기'
  • 오를레앙 허
  • 승인 2009.12.24 09: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 남산국악당 송년레퍼토리 <남산골 허생뎐>

   
오를레앙 허
‘허생전’은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는 소설이다. 박지원은 상공업발달을 중시한 북학파 실학자답게 독서에 파묻혀 사는 허생같은 선비들이 공리공론의 벽에 갇혀있지 말고 스스로가 가진 잠재력을 사회와 국가의 경영에 사용할 것과 상업을 천시하지 말고 유통과 물물교환의 가치를 인식할 것을 주장한다. 작품의 주인공 허생이 살던 곳이 바로 공연을 관람한 남산골이다.

남산국악당은 남산 한옥마을 내에 위치해 있는 데, 이곳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 시(詩,)서(書),예(禮)를 논하던 소박한 삶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깜깜한 남산 위에 빛으로 물든 서울타워를 근사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한옥의 아름다움이 기품있게 드러나있다.

창극은 창을 기본으로 하는 음악극이다. 20세기 초, 판소리가 변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1인 오페라라 불리는 판소리가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만큼 창극 또한 마땅히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소극장 창작 창극시리즈인 ‘남산골 허생뎐’은 남원의 연화원에 살고 있는 희옥과 설희의 이야기이다.

극 속의 극형태로 진행되는 재밌는 구조로 되어 있다. 작창능력이 뛰어난 명창 안숙선이 희옥의 역할을 맡았다. 연화원의 주인인 희옥은 형편이 어려워지자 딸인 설희를 남원부사의 첩으로 보내기로 결심하지만 설희의 재능을 아까워한 박지원이 그의 소설 ‘허생전’을 들려주며 희옥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현실과 이야기속을 넘나드는 상황전환이 흥미롭다.

예전에 대형창극을 본적이 있는 데 ‘심청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화려하고 장엄한 구조의 대형창극과 달리 ‘남산골 허생뎐’은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듯이 도란도란 주고받는 작은 창극이다. 그러하기에 음악도 단촐하고 심플하다. 그러나 악기의 수가 많다고 음악이 커지는 것이 아닌 것이 판소리이다.

‘허생전’의 내용은 실사구시적인 상업적 활동을 통해 ‘선비들이여, 돈을 벌자’ 라는 메시지와 그렇지만 '그대들이여 물질의 노예가 되지는 말자! '라는 이중적 메시지가 함께있다.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주창하는 음악극의 내용과는 달리 우리의 소리에서는 깊이와 여유가 있다.

상황이야 어떠하든지간에 풍자와 해학 그리고 여유로움은 우리 겨레의 참을 수 없는 기질인 것이다. 허생의 초라한 차림새를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오고 변씨에게 만 냥을 빌리는 솜씨나 큰 장사를 해서 열배를 남기는 상업적 수완을 발휘하는 순간에는 놀라움이, 거지나 도적떼들에 나눠주고 심지어 남은 돈은 바다에 던지기까지 하며 훌훌 떠나버리는 장면에서 물질에 초연한  선비다운 모습이 보여진다.

한편, 효율성을 강조하며 관객들의 혼을 빼 놓으려는 듯한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과 분장으로 상징되는 서구식 무대와는 달리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역할이 끝나도 무대를 벗어나지도 않고 상황이 바뀌어도 무대장치를 바꾸려하지도 심지어 의상도 분장도 바꾸지 않는다.

판소리가 가지는 본래의 것이 그렇듯 소리와 행동으로 공간과 인물의 변화를 교류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창극은 이러한 판소리가 중심이 되고 우리나라의 다양한 전통예능, 즉 전통춤, 전통의상, 민속연희, 궁중음악등이 어우러진 독창적 공연양식이며 종합예술인 것이다. 일본의 가부끼나 노, 중국의 경극처럼 세계음악극 시장에 우리나라의 창극이 세계적 위상을 지니고 우뚝서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우리나라 관객입장에서는 이처럼 높은 수준의 동,서양의 문화를 여유만 허락된다면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요즘 서양인들이 점점 동양문화를 배우려고 전향적 태로를 보이는 것은 바야흐로 아시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서양의 것을 배우고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은 그런 면에서 여유롭다. 동양의 시대에 이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더욱 아끼고 지켜나갈 때가 아닐까한다.

오를레앙 허 press@sctoday.co.kr

오르레앙 허 (본명 허성우)

작곡가/재즈피아니스트

음악교육과을 전공, 프랑스 파리 유학.
IACP, 파리 빌에반스 피아노 아카데미 디플롬, 파리 에브리 국립음악원 재즈음악과 수석 졸업.
재즈보컬 임미성퀸텟의 1집 ‘프린세스 바리’ 녹음 작곡과 피아노.
제6회 프랑스 파리 컬러즈 국제 재즈 페스티벌 한국대표(임미성퀸텟)
제1회 한전아트센터 재즈피아노 콩쿨 일반부 우승
현재 숭실대, 한국국제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