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186 미스터 백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186 미스터 백
  • 윤이현
  • 승인 2021.06.11 02: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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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기존의 이름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이름을 바꿨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기존의 이름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이름을 바꿨다.

미스터 백, 87년생으로 기억한다. 186의 장신에 매번 세미 정장을 입고 간드러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걷던 그는, 우리 반의 사회 선생님이었다. 9반을 3반씩 쪼개 수업을 진행하라는 방침에 따라, 그는 지, , 효 이 세 반()을 맡고 있었다. 몹시 각지고 큰 얼굴에 작은 눈과 독특한 하관을 지닌 그는, 다리가 무척 길어서 그런지 걸음이 빨랐다. 한 보폭의 크기도 컸지만, 다리를 움직이는 속도가 일반인과는 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를 보고 나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그가 맡은 세 개 반에 우리 반이 포함된 것, 따라서 아이 대다수가 미스터 백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2학기로 넘어가면서 몇몇 아이들이 그의 팬클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10초 안에 선생님을 똑같이 그려내야만 하는 테스트를 치러야 했다. 별 관심이 없었던 나였지만, 클럽 회장이 선생님과 자주 카톡을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에 들어가기로 했다. 야자를 하면서도, 독서실에서도 나는 틈틈이 그의 캐릭터를 10초 안에 완성할 방법을 생각해냈고 결국 7초 안에 그려 낼 수 있었다.

대망의 테스트 날, 나는 어김없이 수업시간에 졸았고 쉬는 시간엔 친구들에게 새로 만든 노래를 들려줬으며 점심에 나온 추로스를 하나 더 먹기 위해 줄을 섰다. 체육 시간에는 생리한다는 핑계로 벤치에 앉아서 친구 예원이와 수다를 떨었고, 수학 시간에는 쫀드기를 먹다가 걸려 벌점을 받았다. 그렇게 수업은 끝나가고 종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교정 한 가운데 은행나무는 햇볕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났고, 떨어진 은행 열매는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누런 구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그 풍경과 냄새에 잠시 빠져 있다가 ()으로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긴장한 탓인지 연습했던 그것에 비교해서 잘 그리지 못했고, 합격 여부는 저녁에 알려주겠다고 했다.

가을이 되면서 날씨는 꽤 쌀쌀해졌다. 휴대전화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언니가 뽑은 플레이리스트대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높은 하늘을 보면서, 은행나무에서 풍기는 그 얄궂은 냄새를 맡으며 학교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가 퇴근하기 위해 학교를 나오는 걸 봤다. 찰싹대는 걸음으로 오늘도 어김없이 빠르게 걷는 그를 나 역시 빠르게 그리고 조심스레 따라가기 시작했다. 186의 그는 고작 159인 내가 따라가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였다. 서촌길에 들어선 그와 그를 뒤따르는 나, 너무 빠른 그 걸음을 쫓다 보니 머리끝까지 숨이 차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언니의 플레이리스트에서는 인형의 꿈이 흘러나왔다. “한 걸음 뒤에 내가 있는데, 왜 당신을 날 보지 못하냐는 가사가 그렇게 슬플 수 없었다. 선생님은 거리의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걷다가 경복궁역으로 사라졌다. 헐떡이며 한참 그의 잔상을 쫓으며 그 거리에 서 있었던 나는, 그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음을 알고는 울고 말았다. 서글프게. 여전히 이어폰에서는 인형의 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그 노래는 내 인생 노래가 되었다.

내가 그 음악을 좋아하게 된 이유와 그때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던 눈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봤다. 나는 미숙했고 사랑을 잘 몰랐다.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이 내가 아는 사랑의 전부였다. 그를 뒤따라 걷던 날, 영원히 내 짝사랑은 그에게 닿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같은 시간 같은 하늘 아래에 있었지만 우리는 평행선 위에 있었다. 닿을 수도 만날 수도 없는 평행선. 그 사실이 열일곱의 소녀를 서럽게 울렸다. 그날 밤, 나는 팬클럽 주최의 테스트에서 낙방했고, 그림 연습을 했던 공책을 찢어버렸다. 그렇게 열여덟, 열아홉을 거치면서 그 역시 서서히 잊혀져 갔다.

성인이 되어 경험한 사랑은 그에게 느꼈던 것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사소한 일에 자존심 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상대의 감정이 식지 않도록 노력함과 동시에 내 마음도 돌봐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늘 놓여있었다. 후회 없을 만큼 좋아했고, 지쳐서 헤어졌으니 아쉬운 것도 없었다. 다시 보고 싶다거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따금 미스터 백이 떠오른다.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지만, 동경과 사랑이 섞인 그때의 순수한 감정은 아직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미스터 백은 다른 학교로 전근하였다. 친구들이 가끔 내게 미스터 백을 봤다며 이야기를 해주곤 한다. 그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여전히 세미 정장을 입고 왼손엔 시계를 차고 있다고 한다. 오래된 폴더폰과 자신의 얼굴만큼이나 각진 서류가방을 들고서 빠른 걸음으로 유유히 사라지고 만다는 미스터 백. 다행인 것은 그의 얼굴이 밝아 보인다는 소식이었다. 나와 미스터 백은 각자의 평행선에서 잘 나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우리가 기울어진 선 위를 달리고 있다면 한 번은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내 짧은 두 다리로 186의 그를 향해 힘차게 뛰어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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