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정지용문학관에서 신무용가 조택원을 만나다
[성기숙의 문화읽기]정지용문학관에서 신무용가 조택원을 만나다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1.06.1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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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녹음이 짙어가는 5월 중순 충남 옥천에 있는 시인 정지용문학관을 탐방했다. 월북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년경)은 우리에게 ‘향수’의 시인으로 친숙하다. 옥천 하계리에 있는 정지용 생가는 초가집으로 지어져 소박하면서도 옛정취를 더한다. 감나무가 있는 정지용 시인의 생가는 본채를 비롯 곳간과 우물, 사립문 그리고 장독대 등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재현해 놓은 방에는 한약방의 약장과 옷가지, 시집 등이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명시(名詩)로 손꼽히는 ‘향수’에도 나오는 질화로가 놓여있어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생가 옆에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생가에서 정원을 지나 정지용문학관에 이르면 시인의 동상이 탐방객을 맞는다. 아담한 규모의 문학관은 정지용 시인의 체취를 듬뿍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다.

우선 정지용의 시집 초판과 친필 편지 등이 시선을 모은다. 『문학독본』, 『산문』, 『지용시선』, 『백록담』 등 그의 시집 초판을 보는 순간 가슴이 설레였다. ‘정지용 시인과 그의 시대’를 주제로 시인의 삶과 문학을 연대기별로 조망한 코너도 긴요하다. 한국 현대시의 흐름과 정지용과의 관계를 시각화한 전시물과 그동안 발간된 정지용 연구서를 집적한 코너는 시인의 문학사적 위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충북 옥천 하계리 출생인 정지용은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교토의 도시야(同志社)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0년대부터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했으며 귀국 후 이화여대 교수, 경향신문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시단(詩壇)에서 정지용은 한국 현대시의 발원자로 평가된다.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절제된 표현과 향토적 서정성으로 독창적인 시 세계를 펼쳐 주목을 끌었다.    

시인 정지용이 신무용가 조택원과 막역한 사이였음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지용은 조택원이 신무용 거장으로 발돋움하는데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직후 친일무용가로 몰려 위기에 처한 그를 비호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알다시피 조택원은 일제강점기 최승희와 더불어 세계적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춤의 선구자다. 함경도 함흥의 양반가에서 태어난 조택원은 일본에 유학, 이시이 바쿠(石井漠) 문하에서 서양 모던댄스를 체득한다. 이시이 바쿠는 1920년대 초반 유럽에 유학하여 독일 마리 뷔그만의 현대무용을 학습하고 자국의 전통과 접목하여 신흥무용을 개척한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조택원은 1933년 ‘승무의 인상’(후에 ‘가사호접’으로 개칭)을 안무한다. 창작 당시 조택원은 조선의 전통에서 소재를 찾고자 김백옥이라는 기생을 찾아가 전통춤 승무를 배웠다. 새로운 무대어법으로 접근한 ‘가사호접’은 ‘전통의 현대화’의 소중한 결실로 회자된다. 

‘전통의 현대화’를 화두로 한 ‘가사호접’은 어떤 모습일까. 흰색 바지저고리에 장삼과 고깔을 착용하고 붉은 가사를 두른다는 점에서 전통승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춤사위 표현기법에서 장삼을 뿌리거나 여밀 때 손목에 강한 액센트를 주어 직선적 표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승무의 춤사위와 차이가 있다. 또 한국무용사에서 최초로 작곡된 서양음악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근대 서구식극장에 걸맞은 공연미학을 구현하여 순수 예술무용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도 기념비적이다.  

‘가사호접’은 해외에서도 찬사가 쏟아졌다. 프랑스의 무용평론가 페르느와 디보는 작품에 내재된 종교적 색채와 드라마틱한 철학적 표현, 영혼의 번민이 가미된 신비롭고 순수한 동양적인 멋”이 깃들어 있다고 호평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예술감독을 지낸 세르주 리파는 ‘가사호접’에 투영된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조택원에게 서양무용을 추지 말고 자국의 전통(춤)을 더 깊이 파고들라고 조언했다.

‘가사호접’은 시인 정지용과도 인연이 깊다. 작품을 감상한 정지용은 “광대한 호흡이 돋보인 작품으로 무대와 극장의 약속이 이행된 ‘大男子의 大僧舞’”(『동아일보』, 1938년 12월  1일자)라고 극찬했다. 1933년 초연된 ‘승무의 인상’은 1943년 정지용에 의해 ‘가사호접’으로 개칭되었다. 개칭된 제목에 대해 조택원은 운치와 함축성이 담지된 시인다운 제목이라며 만족해했다는 후문이다. 

시인 정지용과 무용가 조택원은 휘문고보 선후배 사이로 알려진다. 함흥 출신 조택원은 1920년 학업을 위해 경성으로 이사한다. 휘문고보 재학 시절 뒤쳐진 학업을 위해 옥천 출신인 선배 정지용을 가정교사로 들여 과외를 했다고 전한다. 정지용은 조택원의 선배이자 가정교사였던 셈이다. 두 사람은 일생 동안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조택원은 해방직후 좌우익의 이념대립으로 혼란을 겪던 시절, 진보적 성향의 조선무용건설본부 소속 무용가들에게 친일무용가로 낙인찍혀 비판받는 등 위기에 놓여진다. 당시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있던 정지용이 조택원을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는 등 그를 격하게 엄호했다.

격동의 시기 극심한 사회적 혼란 속에 조택원은 1947년 미국으로 떠났다. 정지용 또한 6.25때 월북했다. 그는 월북 당시 조택원의 아들 병문(昞文)을 데리고 갔다고 전한다. 조택원의 아들은 엄청난 수재였고, 월북 후 김일성대학 교수를 지냈다는 설도 있다. 

조택원은 1973년 자신의 삶과 예술의 궤적을 기록한 자서전 『가사호접』을 출간했다. 정지용이 붙여준 신무용 명작 ‘가사호접’ 제목을 그대로 썼다. 두 사람의 남다른 우정과 깊은 신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옥천 정지용문학관에서 문학과 무용의 두 거장이 남긴 근대의 편린(片鱗)을 음미하면서 마음의 양식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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