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프리뷰] 사물의 생(生)을 더듬어 생태를 탐구하는 작가,《정재철: 사랑과 평화》展
[전시프리뷰] 사물의 생(生)을 더듬어 생태를 탐구하는 작가,《정재철: 사랑과 평화》展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1.07.08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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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 다음달 29일까지
정재철 작가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전시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여행과 삶이 곧 예술’이었던 故정재철 작가의 전시가 열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박종관)는 2021년 기획초대전《정재철: 사랑과 평화》다음달 29일까지 아르코미술관(관장 임근혜)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작고한 故정재철 작가를 추모하고 회고하기보다, 그가 사회에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를 여전히 유효하게 만드는 장을 선보인다.

아르코미술관의 기획초대전은 동시대 미술의 변화 속에서 예술적·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작가의 작업세계를 재조명하는 대표적 전시다. 그의 작품을 후배세대 영화감독, 연구자가 재조명하고 그 의미를 탐구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선보인다.

이번 전시의 주요 작품은 정재철 작가의 개념적·수행적 미술 작업을 대표하는 <실크로드 프로젝트> (2004-2011), <블루오션 프로젝트>(2013-2020) 등이다. 또한 드로잉, 화첩 등 미공개 유작 24점 및 작가노트, 아카이브 자료 50여점이 함께 공개된다.

▲정재철, 3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201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3분 43초(사진=아르코 제공)
▲정재철, 3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201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3분 43초(사진=아르코 제공)

자신의 몸으로 직접 사유하고 행동하며 쌓아 온 작업

정재철은 20여 년간 자신의 몸을 매체로 삼아 “경계를 넘고 관점을 이동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재활용돼 순환하는 사물을 통해 생태에 대한 사유를 펼친다. <실크로드 프로젝트> 당시 정 작가는 한국의 폐현수막을 해외로 가져가 현지에서 현수막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 기록했다. 한국의 폐현수막은 현지에서 햇빛 가리개와, 가방, 식탁 보 등으로 활용됐다. 정 작가는 폐현수막으로 만든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유럽 광장을 횡단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블루오션 프로젝트>(2013-2020)는 바닷가에서 주운 쓰레기들을 모아 하나의 설치미술을 만들어냈다. 바다에 떠내려 온 플라스틱병, 폐그물, 부표, 비닐, 라이터 등을 나열한 형태를 보고 정 작가는 바다 괴물 ‘크라켄의 자락’이라고 지칭했다고 한다.

▲정재철 '블루오션 프로젝트', 정재철은 이 형상을 크라켄의 자락이라고 지칭했다고 한다(사진=서울문화투데이)
▲정재철 '블루오션 프로젝트', 정재철은 이 형상을 크라켄의 자락이라고 지칭했다고 한다(사진=서울문화투데이)

정재철의 작업을 보면 ‘수집’과 ‘순환’의 개념이 떠오른다. 용도가 다해 버려진 사물들을 섬세하게 모아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키는 그의 작업과정에서는 존중의 태도가 읽힌다. 전시를 기획한 노해나 학예사는 “정 작가는 인간이 아닌 장소나 사물, 비인간적인 것들을 대할 때에도 존중의 태도를 가지고 접근한다”라며 “버려진 사물을 봤을 때 하나의 생의 주기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 다른 가치로 전환된다는 믿음을 가져, 생기를 부여하고 그런 태도로 생태에 대한 사유를 이어나갔다”라고 설명한다.

‘사물의 생(生)의 주기’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사물에 ‘생(生)’이 부여된다는 것 자체가 예술인이 아니라면 쉽게 인식할 수 없는 시각이다. 정재철 작업 이면에는 시적인 은유가 많이 담겨있다. 하나의 오브제를 마주했을 때 그 오브제가 어디에서 왔고 오브제가 가진 흔적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역사를 더듬어 탐구하는 사유다.

▲정재철 '블루오션 프로젝트' 전시품, 바다쓰레기가 엉겨붙은 돌, 각각 전시품마다 좌표가 제목으로 정해졌다(사진=서울문화투데이)
▲정재철 '블루오션 프로젝트' 전시품, 바다쓰레기가 엉겨붙은 돌, 각각 전시품마다 좌표가 제목으로 정해졌다(사진=서울문화투데이)

노 학예사는 “어떤 장소에서 오브제를 가지고 왔을 때, 정 작가는 그 사물이 놓여 있던 장소의 한 부분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인식했다”라면서 “사물에 생을 부여하고 순환과 존중에 대한 인식을 넓힌 정 작가는 종족과 생명‧비생명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이어왔는데. ‘블루오션 프로젝트’ 당시엔 해류 시스템은 국가 간의 경계를 넘어서 작동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작업을 펼쳤다”라며 정재철이 표현하고자 한 작품 속 메시지를 전했다.

<블루오션 프로젝트> 전시 공간에는 바다 쓰레기들이 암석처럼 변해 굳은 돌을 전시한 구역이 있다. 각각의 전시품에는 특정한 좌표가 적혀있는데, 이는 그 돌이 발견됐던 지역을 뜻하거나 그 돌의 역사가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곳을 작가가 설정해 정한 것이라고 한다.

정재철 사유와 작품세계가 담긴 섬세한 기록

정재철은 자신의 작업들을 모두 섬세하게 기록하고, 여행을 한 경우에는 그 궤적을 지도 위에 남기기도 했다. 거대한 크기의 작품인 <실크로트 프로젝트 루트맵 드로잉>, <제주일화도>는 그가 진행한 프로젝트를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제주일화도>의 경우 <블루오션 프로젝트> 당시 사물을 발견한 지점과 바다 위에서 부표를 발견한 지점도 기록 돼 있다.

▲정재철, 제주일화도, 2019, 장지에 채색, 150×210cm(사진=아르코제공)
▲정재철, 제주일화도, 2019, 장지에 채색, 150×210cm(사진=아르코제공)

전시장에서는 정재철이 직접 작성한 작업 노트와 기록들도 만나볼 수 있다. 수첩에 날짜를 적고 하나씩 지워나간 표시는 그가 행한 작업의 수행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런 그의 기록들은 후배 예술가들이 작가의 세계관을 확장하고 당대적 의미를 발굴하는 열쇠가 되기도 했다. 아키비스트이자 연구자 이아영은 정재철이 1996년부터 2020년 사이 남긴 작가노트 58권에서 선별한 텍스트를 연대순으로 발췌해 <사유의 조각들(Pieces of Thoughts)>이라는 출판물을 제작했다. 이는 정재철의 예술가로서 존재론적 질문과 미술의 사회적 실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전한다.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백종관 작가 (사진=서울문화투데이)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백종관 작가 (사진=서울문화투데이)

정재철의 영상 기록을 재구성한 후배 예술가의 작업도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고양레지던시 2021년 17기 입주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영상 감독 백종관은 정재철이 여행하며 촬영한 영상, 사진기록, 작가노트를 자신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영상 <기적소리가 가깝고 자주 들린다>를 선보인다.

백종관 작가는 실제로 정재철 작가를 만나본 적은 없다고 한다. 정 작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없어서, 그의 기록들을 살펴보고 재구성하는 것이 백 작가에게 정재철이라는 국가를 여행하는 경험을 제공했다고 한다.

<기적소리가 가깝고 자주 들린다>는 정재철이 직접 촬영한 영상들을 교차하고 이어붙이며, 정재철의 문장 기록을 영상 위에 같이 띄운다. 영상 속에서는 기차의 창밖 풍경이 나오는 동시에 그 위로 이질적인 다른 영상 기록이 입혀지기도 한다. 영상과 같이 촬영된 소리가 아닌 다른 영상의 소리를 입히기도 했다. 고요한 전시장에서 <기적소리가 가깝고 자주 들린다>를 지켜보면, 길 위에서 정재철이 쌓아왔던 고민과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백 작가는 정재철의 기록을 살펴보며 그가 가지고 있던 ‘양면성’에 대해 주목했다. 백 작가는 “정재철의 프로젝트 영상의 경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정재철 인간의 사유는 많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다”라며 “기록과 영상을 살펴보면 예술가 정재철과 여행하는 인간 정재철을 모두 만나볼 수 있었는데 그 두 개의 모습을 영상 안에 담아내고자 했다”라고 작품 설명을 덧붙였다.

수행적 행위로 작업을 이어 온 정재철의 기록 속에는 여행자로 겪는 힘듬과 갈등도 담겨있었다고 한다. 백 작가의 영상 작업을 보다보면,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힘들다는투정 섞인 작가의 말을 만나볼 수 있다. 정재철의 예술 뿐 만 아니라 그가 지나온 흔적을 함께 더듬어, 더욱 폭넓게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장을 열어 보인다.

전시제목 ‘사랑과 평화’는 지난 2010년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마지막 여행지였던 영국 런던에서 팔러먼트 광장(Parliament Square)을 점거한 반전 시위 캠프 천막 위에 정재철이 한글로 적은 문구다. 정재철 작업에서 발견되는 ‘사랑’과 ‘평화’라는 단어는 자신이 사회참여적 프로젝트를 위해 경계를 넘나들고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면서 지향했던 공동의 지평 그 자체다.

▲02_정재철,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루트맵 드로잉 1, 2006, 장지에 연필, 채색, 248×483cm (사진=서울문화투데이)
▲02_정재철,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루트맵 드로잉 1, 2006, 장지에 연필, 채색, 248×483cm (사진=서울문화투데이)

이번 전시는 이러한 작가의 수행적 작업에 담긴 세계관과 방법론을 연대 실종, 정치적·환경적 위기 상황을 마주한 오늘날을 유지하기 위한 대안적 사유와 실천으로 재조명 한다. 전시 중에는 정재철 작품세계를 심화해 살펴보는 전시연계프로그램(토크, 워크숍)이 개최될 예정이며, 자세한 정보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 홈페이지와 SNS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 관람은 네이버사전 예약 시스템을 통해 운영되고 입장료는 무료다.(02-760-4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