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interview] 박상희 조각가 “내 작품의 재료는 나의 욕망과 그리움, 아픈 상실과 몽상이다”
[Artist interview] 박상희 조각가 “내 작품의 재료는 나의 욕망과 그리움, 아픈 상실과 몽상이다”
  • 이지완·안소현 기자
  • 승인 2021.07.14 09: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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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험 기반으로 시대정신 담아내는 예술가
오래된 시계로 희로애락 담아내는 ‘시간의 초상’
종교 아이콘 혼합해 화합 추구하는 조각 선보여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안소현 기자] 여행은 다른 세계를 발견하고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일단 길을 떠나면 익숙한 세계의 안락함은 끝나고, 여행자는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타지 사람들이 견고하게 구축해온 질서 앞에서 익숙한 세계의 질서는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여행자는 반복되는 충돌을 경험하며 자기 세계에 균열을 내고 스스로 확장해나갈 수 있다.

예술과 여행은 닮은 점이 많다. 미술 작품은 이미지로 응축된 낯선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은 예술가가 세심하게 구축한 경험의 장에서 일상의 질서와는 다른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달리 생각해볼 기회를 얻는다.

박상희 조각가는 끊임없이 여행하는 예술가다. 어려서부터 바깥세상이 궁금해 길을 헤매고 다녔다고 한다. 중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성인이 될 때까지 자유롭게 방랑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러다 예술가가 되고자 대입 검정시험을 거쳐 1982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해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강화도 작업실서 인터뷰에 응하는 박상희 작가
▲강화도 작업실서 인터뷰에 응하는 박상희 작가

1989년에 세계여행이 자유화되자 여러 나라를 주유하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는 프랑스에서 재불 작가로 활동하는 한편 다양한 나라를 계속 여행했다. 2004년이 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첫 개인전 '얼굴_그 너머...'를 인사아트센터에서 2006년에 개최했다. 작가의 오랜 외국 생활이 녹아들어 있는 전시였다. 그는 프랑스 체류 기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며, 그들의 얼굴과 표정 속에서 개인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이 교차하는 것을 보았다. 오래된 시계 등 다양한 재료의 물성을 강조해 시간 속에 위치한 현대인의 초상을 구현했다. 이때 박상희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간의 초상’ 시리즈가 전시됐다.

▲시간의 초상, 2003, 시계.mixed media, 20x30x20cm
▲시간의 초상, 2003, 시계.mixed media, 20x30x20cm

2012년에는 갤러리 도스에서 '박상희展‘을 열었다. 다양한 종교적 도상을 혼성모방한 조각 작품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작가는 겉보기에 서로 상이해 보이는 종교들이 실은 구원과 자비라는 하나의 메시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종교 갈등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사랑이라는 키워드 안에서 경계가 지워지고 모든 것이 하나로 화합하는 작업이었다.

서울문화투데이는 지난 5일 박상희 조각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의 삶과 역사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전달해온 박 작가의 예술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박상희 작가

강화도에 작업실을 두고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다양한 활동을 하기도 어렵고, 작품을 선보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을까? 예상치 않았던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바람이 길고 세게 불어대는 가운데 어렵게 피운 꽃을 보여줄 기회도 줄고 대면하지도 못한 채 시드는 꽃을 보는 것이 안타깝다. 나만이 아니라 많은 작가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다.

문화는 경제가 좋을 때는 혜택을 가장 늦게 받고, 경제가 나쁠 때는 가장 빨리 영향을 받지 않는가? 어서 일상을 되찾길 바라면서 강화도에서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비축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서울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모교 강단에도 서 왔다. 젊은 시절부터 조각에 대한 올곧은 의지를 정한 것 같다. 작가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법 중에 ‘조각’을 택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흙이나 돌, 나무 등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물성을 탐구하면서 손으로 직접 형태를 만들어갈 때 곧장 느껴지는 촉감이 가장 좋았다. 또 재료의 다양성 측면에서 회화보다 표현의 스펙트럼이 더 넓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본 세상을 하나의 입체적인 상징물로 표현하는 것이 평면의 회화보다 더 적성에 맞았다고 할까?

하지만 붓질의 자유로움과 색의 무한한 확장성 등도 좋아하기에 덩어리로 표현하는 형상에도 색을 많이 쓰는 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내 조각에 회화성이 있다고들 한다. 지금은 굳이 조각과 회화를 나누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한다.

2001년부터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면서 중동, 아프리카 세계 각지를 여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과정은 작가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당시 시간은 박 작가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인상 깊은 경험이 있다면 들려 달라.

나는 1989년부터 인도, 네팔, 히말라야, 유럽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많은 지역을 여행했다. 동서양 문명과 종교의 차이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을 작가의 입장해서 관찰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 및 계율의 형식 측면에서 겹치면서도 다른 점이 많다. 다시 말해, 두 종교는 신도와 신이 관계를 맺어나가는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뿌리의 유일신을 믿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지금까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여 어린이까지 죽어 나가고 있지 않은가? 모순이다.

여기에는 물론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종교 및 지정학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나는 종교와 문명이 충돌하는 현장에서 성령스러운 느낌에 젖어 신에 대한 의문과 질문을 던지게 됐고, 그 결과 종교의 이콘이나 마오쩌둥 같은 현대의 우상까지도 작품의 주제로 하게 됐다.

가장 인상 깊은 경험은 중동의 한 쇼핑센터에서 했다. 한 여인이 장신구를 착용해보려고 온몸을 가리고 있던 검은 차도르를 잠시 벗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다. 카르티에 등의 명품 귀금속으로 치장하고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있었다. 평소에는 계율에 따라 아름다운 눈과 얼굴을 차도르나 히잡으로 어쩔 수 없이 감추지만, 꾸미고 싶은 본능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슬람 여성들이 서구 자본주의를 이용해 자유의지와 저항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이런 관찰들이 작품으로 표현된다.

▲차도르, 2006, 브론즈, 30x30x55cm
▲차도르, 2006, 브론즈, 30x30x55cm

박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탐구를 보이는 것으로 끌어내고 있다. 시간이나 믿음, 종교에 대한 표현이 그러하다.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끌어내는 순간, 실체를 가진 작품에는 시간과 공간, 역사 등 수많은 것이 압축될 수도 있고 인간과 신, 갈등, 화합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탐구는 어떤 지향을 갖고 있는가?

작가란 일반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메타포로 보여주는 이들이 아닐까? 작가는 자신의 눈과 감성을 거쳐 구현된 새로운 형상과 상징으로 대중의 마음에 울림을 주고자 한다.

한 시대의 저변에 흐르는 패러다임을 이미지로 변용해 시대정신을 구체적으로 체감케 하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흔들리는 나뭇잎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2012년 제작한 ‘피에타’ 작품이 인상적이다. 성모마리아와 반가사유상의 자세가 비슷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 작가의 작품을 본 순간, 기독교와 불교는 분명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기자 인식이 깨졌다. ‘피에타’는 종교의 화합, 다르지 않음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다름, 차이가 어떻게 생겨난다고 보는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보는가?

‘피에타ㅡ불이(不二)’는 동서양을 대표하는 이콘인 반가사유상과 마리아의 앉아 있는 형태의 유사성을 차용하였습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해탈과 구원은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라는 측면에서 둘이 아닌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불이(不二)의 개념을 통해 새롭게 해석한 피에타의 파격적인 형상성으로 의식의 전복을 일으키고자 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 작품을 처음 전시할 때, 신문 기사를 보고 두 노신사가 찾아왔다. 그 두 분은 ‘피에타ㅡ불이(不二)’ 작품 앞에서 기도와 절을 올렸다. 이 모습을 보고 내가 "특별히 기도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하고 물었다. 노인은 "20여 년 전에 불교를 믿었다가 지금은 교회를 다닌다. 부처님이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두 분께 한 번에 기도할 수 있기에 찾아왔다"라고 대답했다. 명쾌하면서도 경계가 없는, 열린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게 작가의 역할이지 않을까?

2016년 “불이(不二) 초대전” 당시 쓴 작가 노트 속 “예술가는 총을 들지 않은 테러리스트”라는 문장이 인상 깊다. 본지에 청와대 앞길 개방 요구에 대한 부드러운 칼럼을 기고해 주기도 했다. 작가는 사회에 예술로 목소리를 전하는 이들이라 생각한다. 청와대 앞길이 개방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조각가 박상희는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지 궁금하다, 혹시 예술적 테러를 준비하고 있다면 어떤 것일까?

‘예술적 테러’라는 말은 기존 관습과 익숙한 형상성을 파괴해 새로운 형상을 보여주는 행위를 반어적 레토릭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시대 관해 작품으로 발언하고 질문하는 사람이지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가는 미학적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피에타-不二, 2012, mixed media, 67×53×94cm

강화도 천상병 시인 동상의 재밌는 일화를 들었다. 천상병 시인이 들고 있는 술잔에 누군가 계속 막걸리를 따라두었다는 얘기였다. 박 작가는 처음에는 작품이 손상될까 황당하고 화도 났었다고 했다. 하지만 천상병 시인을 추모하는 진정성을 이해하게 됐다고 했는데, 여전히 술잔에 막걸리를 따라져 있는지.

처음 동상의 손에 들려있는 술잔에 막걸리가 담겨 있는 걸 발견했을 때, 작품이 변색되거나 파손될까봐 걱정도 되고 황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을 추모하려는 제스처가 겨울을 지나 봄까지도 계속되는 것을 보고, 그 역시 작품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까지도 막걸리를 따라두거나 장미꽃을 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죽어서도 이렇게 추모받는 시인의 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간의 초상’ 시리즈는 어떤 배경에서 제작된 것인지 알고 싶다.

스페인 코르도바에 갔을 때였다. 성령이 충만한 듯한 아주 오래된 성당에서 기도하고 나왔을 때 차 사고를 목격했다.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는데, 순간 그의 피 묻은 손과 성당에서 촛불을 밝히던 신부의 손이 겹쳐 보였다. 묘한 경험이었다. 며칠 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누군가가 기도하는 시간에 다른 누군가는 남의 것을 훔치기도 하고 죽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손목에서 다양한 시간을 보냈던 시계들, 프랑스 벼룩시장 등에서 수집하거나 사랑의 증표로서 결혼식 때 주고받던 시계들 등 한 개인의 슬픔과 기쁨 등 일상을 기억했던 시계들로 현대인의 초상을 형상화했다.

미술진흥법 제정으로 미술계 안팎으로 추급권(미술품재판매보상권) 도입 문제나 지원 문제에 대한 많은 의견이 오갔다. 관련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창작자 대표로 참석한 김창겸 미디어아트협회 이사장은 미술계 진흥과 미술인 권리 보호를 위한 법안이 미술계 전반을 아우르지 못한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대안공간이나 비엔날레만 오가는 작가들을 예시로 들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미술 작가에게도 추급권이 절대 필요하다. 가수의 경우 사후 70년까지 저작권이 유지되며, 유족에게 상속할 수도 있다. 유명 가수가 TV에서 저작권이 일 년에 5억 원이나 된다고 했을 때 너무 부러웠다. 우리 같은 미술 작가의 경우, 무명일 때 적은 값에 팔렸던 작품의 가치가 수십 년 후에 백배, 천배 올라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박수근, 이중섭만 하더라도 본인들은 물론 유족들도 전혀 혜택을 받지 못했다.

추급권은 현재 전 세계 약 80여 개국에서 시행되는 것으로 나와 있다. 프랑스에서는 1920년부터 보장된 권리다. 추급권은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하고 기본 생존권을 보장하는, 일종의 연금 같은 것이다.

예술가가 생존을 걱정하지 않는 사회는 문화적으로 건강하다. 우리도 빨리 추급권이 시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미술품 거래의 투명성이 전제돼야 한다.

▲박상희 작가

코로나 확산은 우리 사회 이곳저곳을 뒤흔들었다.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움직임도 시작되고 있다. 온라인 전시나 가상공간 전시 등의 시도다. 현실 공간에 제약을 넘어서는 시도들이 눈에 띄고, 대중의 시선이 영상 매체로 주목되고 있는 경향도 보인다. 앞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미술, 특히 조각은 어떻게 변화할 거라 예상하는가.

미술 뿐 아니라 음악, 공연 등이 점차 비대면 형식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전시 방식과 작품 제작 및 판매와 구입의 형식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메타버스라는 가상현실에서 간접체험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대중들의 미의식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가상의 집에서 살 수는 없듯이 조각은 입체라는 특성상 재료와 표현의 방식은 달라질지라도 고유의 입체적 형태를 유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중견작가다. 앞으로 탐구하고 싶은 소재나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지.

사실 오래전부터 돌. 나무, 철 등 고전적인 재료 외에 깃털이나 물, 살아있는 물고기. 버려진 오브제, 네온사인 등 표현코자 하는 작품에 필요한 다양한 재료로 작품을 해왔다. 내 욕망과 그리움, 아픈 상실과 몽상까지도 작업의 재료다. 작품을 한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 즉 가보지 못한 세상으로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곳으로 가겠다고 목적지를 정했으나 여행 도중 목적지는 바뀔 수 있다. 그것이 여행인 것이고 인생 아닐까? 예술도 그렇다. 그래서 작품을 한다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늘 설렌다.

하나의 트렌드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서 인간의 본질과 시대와 역사를 관통하는 나만의 형태로서 세상에 대한 다양한 발언을 하고 싶다. 그 여행의 끝은 어디일지 몰라도.

 


박상희 조각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모교에서 강사로도 재임했다. 수년간 프랑스 파리에 살면서 인도, 중동,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며 문명과 인간 및 종교에 대한 사유를 작품화하고 있다.

93년 송은문화재단이 후원한 금호미술관 개인전과 러시아, 파리, 2016년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인 네모복합문화공간 등에서 14번째 개인전을 했다. 그의 작품은 호암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양제철소, 해인사 등에 설치돼 있다. 시 ‘귀천’의 탄생지인 강화도에 있는 천상병 시인의 동상을 제작하였으며, 작품 ‘시간의 초상’은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