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프리뷰]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국민에게 첫 선
[현장프리뷰]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국민에게 첫 선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1.07.2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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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5m 넘는 대형 벽화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공개
1976년 현존 유무 확인됐던 이중섭 ‘황소’ 첫 전시
한국미술에 스며든 서양미술 처음 볼 수 있는 백남순 ‘낙원’
이건희 컬렉션 1,488점 중 58점 선보여
MMCA서울관, 오는 21일부터 내년 3월 13일까지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미술관 소장품 예산을 좀 더 높게 책정받기 위해 기획재정부에 협의를 갈 때마다 발표 자료로 준비해가던 대작, 김환기 점화와 이중섭 황소가 드디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됐습니다” 이번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을 기획한 박미화 과장이 지난20일 언론간담회에서 밝힌 벅찬 소감이었다.

故이건희 회장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작들을 처음 공개하는 전시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이 21일부터 내년 3월 13일까지 MMCA 서울관에서 개최된다. 1920년대부터 1970년까지 제작된 작품들을 ▲수용과 변화 ▲개성의 발현 ▲정착과 모색이라는 주제로 나눠서 전시한다.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281.5x567cm.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281.5x567cm.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근‧현대 유명 화가들의 대작, MMCA 소장품 격을 높여

이번 특별전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작품은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다. 두 번째 ‘개성의 발현’ 주제 전시공간에서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며 온화한 서정을 뿜어내고 있다. <여인들과 항아리>는 1950년대 조선방직을 인수해 방직재벌 기업가가 된 삼호그룹 정재호 회장의 주문으로 제작된 대형 벽화용 작품이다. 60년대 말 삼호그룹의 쇠락으로 미술시장에 나와 이건희 컬렉션에 소장된 것으로 파악된다.

동양의 미학과 달항아리에 남다른 사랑을 갖고 있던 김환기에게 달항아리와 항아리 곡선은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프였다. 대형 벽화 크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는 대작이 가진 거대한 에너지를 내뿜으면서도, 그 힘이 전혀 거칠게 다가오지 않는다. 여인들이 들고 있는 항아리와 인물 형상은 비대칭의 자연스러운 선과 투박한 색면으로 표현돼 화폭을 수놓고 있다. 이 작품은 김환기가 주로 사용했던 백자 항아리, 학, 사슴, 꽃장수의 수레 모티프를 담고 있다.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1954,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사진=MMCA 제공)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 1954,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사진=MMCA 제공)

‘개성의 발현’ 주제 공간에선 1945년 해방과 한국 전쟁 시기 속에서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간 김환기, 유영국,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가로 5m를 넘는 대작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를 중심으로 이중섭, 장욱진, 박수근, 유영국의 작품이 하나의 맥을 만들 듯 배치돼 있다.

박수근 <절구질하는 여인>과 <유동>은 박수근 특유의 색감과 마티에르의 완성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중섭 <황소>는 대중에게 거의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붉은 황소 머리를 그린 이중섭의 작품은 현존하는 것은 총 4점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 전시에 공개된 황소는 1976년 처음 알려지기 시작해 1990년 발간된 금성출판사 이중섭 화집에 수록된 바 있으나, 거의 전시된 적이 없었다.

▲이중섭, 황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6.5x36.7cm. (사진=MMCA제공)
▲이중섭, 황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6.5x36.7cm. (사진=MMCA제공)

‘수용과 변화’…동양과 서양의 무릉도원 아우르다

첫 번째 주제 공간 ‘수용과 변화’에서는 백남순 <낙원>과 이상범 <무릉도원>으로 전시장의 막을 연다. <낙원>의 제작연도는 1936년 경, <무릉도원>은 1922년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새로운 문물의 유입이 시작된 이 시기에는 조선 전통 서화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낙원>과 <무릉도원>은 동서양 회화의 특징이 융합하고 변모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백남순 <낙원>은 캔버스 천을 바탕으로 한 유채 작품이면서, 병풍의 형태를 띠고 있다. 병풍식 유화로써는 전 세계 최초라는 것이 윤범모 MMCA관장의 설명이다. 이 작품에서는 야자수 같은 서양 나무와 동양 건축물이 공존하고 있어, 동서양의 도상이 혼합된 독특한 느낌을 자아낸다. 서양화를 공부한 1세대 한국 화가의 변화를 향한 고민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백남순, 낙원, 1936년경, 캔버스에 유채; 8폭 병풍, 173x372cm. (사진=MMCA 제공)
▲백남순, 낙원, 1936년경, 캔버스에 유채; 8폭 병풍, 173x372cm. (사진=MMCA 제공)

이상범 <무릉도원>은 <낙원>과 마주하고 있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관람객은 이 두 작품의 사이를 거닐면서 서양과 동양의 이상향을 동시에 느껴볼 수 있다. 이상범 <무릉도원>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소설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림 오른쪽에서부터 이야기가 순서대로 펼쳐져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주제나 표현기법에서 전통적인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지만 왼쪽 대각선으로 펼쳐진 진인동 장면에서 일점투시도법(한 점을 시점으로 한 원근법)을 적용해 사실적 공간감을 구현했다. 이는 근대적 시점을 수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양과 동양의 이상향을 우측, 좌측에 두고 다음 전시공간으로 들어서면 변관식 <무장춘색>을 마주할 수 있다. 이 작품 또한 관념산수화(실제 있는 것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닌, 상상해서 그리는 작품)다. 변관식과 이상범은 관념산수화에 있어 극과 극의 성향을 보여주는 관계였다고 한다. 이상범은 근대적인 요소와 인물을 그림에 담아내는 반면 변관식은 동양적인 요소를 그림에 남겨두었다고 한다. <무장춘색> 속에서도 한복을 입고 있는 인물을 찾아볼 수 있다.

▲이상범, 무릉도원, 1922, 비단에 채색; 10폭 병풍, 이미지 159x39x(2), 159x41x(8)cm, 병풍 202x413cm. (사진=MMCA제공)
▲이상범, 무릉도원, 1922, 비단에 채색; 10폭 병풍, 이미지 159x39x(2), 159x41x(8)cm, 병풍 202x413cm. (사진=MMCA제공)

병풍 형식 그림 세 작품을 연이어 감상하면서, 전시장을 찾은 이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꿈꾸었던 낙원과 이상향에 대해서 탐구해볼 수 있다. 또한. 그림이 전하는 편안한 분위기와 희망적 염원을 통해 현 시대상황을 견딜 수 힘을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서구 매체 유화가 등장하고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 등 생경한 용어도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이전과는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 예가 김종태 <사내아이>다. 김종태 그림은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며, 자연스러운 한 순간을 포착해내는 것이 특징이다. 서양화이지만 동양화의 ‘일필휘지(一筆揮之)’를 보는 듯, 간단한 붓질로 대상을 묘사하는 탁월한 능력이 돋보인다.

<사내아이>가 가지고 있는 일화도 작품을 폭넓게 감상할 수 있는 재미를 준다. 신문, 도록, 사진 등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수많은 김종태 작품 중 현존하는 작품은 <사내아이>를 포함해 총 4점뿐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에 국립현대박물관이 김종태의 그림 3점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번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으로 모든 작품을 소장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변관식, 무창춘색, 1955, 종이에 수묵채색; 6폭병풍, 136.5×47×(2), 136.5×59.5×(4), 181x357cm.(사진=MMCA 제공)
▲변관식, 무창춘색, 1955, 종이에 수묵채색; 6폭병풍, 136.5×47×(2), 136.5×59.5×(4), 181x357cm.(사진=MMCA 제공)

정착과 모색, 한국 미술 다양성을 확장해

마지막 공간인 ‘정착과 모색’에서는 전후시기를 거치며 독보적인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기반을 닦아나간 작품을 전시한다.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만들어간 이성자, 남관, 이응노, 권옥연, 김흥수, 문신, 박생광, 천경자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 공간에서 전시를 기획한 박미화 과장이 특히 애정을 표현했던 작품은 이성자 <천년의 고가>다. 박 과장은 “1950년대 이후 여성작가 작품 중 이성자의 작품을 많이 선보이고 싶었고, ‘천년의 고가’를 대여해 전시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실제로 성사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라며 “이 시기 여성작가 대작을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할 수 있게 돼 감개무량하다”라는 심정을 밝혔다.

▲이성자, 천 년의 고가, 1961, 캔버스에 유채, 196x129.5cm.(사진=MMCA 제공)
▲이성자, 천 년의 고가, 1961, 캔버스에 유채, 196x129.5cm.(사진=MMCA 제공)

이성자는 슬하에 3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1950년 파리로 떠날 때 아들들을 데리고 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생진 죄책감과 그리움을 그림으로 많이 표현했다. 이성자는 박수근처럼 긁어내는 듯한 붓 터치를 많이 선보였는데, 이는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상처와 감정을 승화해낸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성자는 1965년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세 아들과 만나고, 그 이후 좀 더 자유로운 작품 세계를 펼쳤다고 한다.

한편, 마지막 전시 공간에선 이건희 컬렉션이 가져온 새로운 연구 과제를 담고 있는 작품도 선보인다. 박 과장은 “개인적으로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주목했던 작가로 박항섭이 있는데, 이번에 박항섭 작품을 기증받고 전시에서 공개할 수 있어서 큰 만족감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권옥연의 연구를 더 이어 갈 수 있는 주요한 작품이 기증돼 앞으로 한국 미술사의 빈 지점을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드러냈다.

▲천경자, 노오란 산책길, 1983, 종이에 채색, 96.7x76cm.(사진=MMCA 제공)
▲천경자, 노오란 산책길, 1983, 종이에 채색, 96.7x76cm.(사진=MMCA 제공)

이번 기증은 미술사적 가치뿐 만 아니라 국현 미술관 역사상 최대 기록이다. 근‧현대미술사를 아우르며 20세기 초 희귀하고 주요한 국내 작품에서부터 해외 작품까지 포함,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의 질과 양을 비약적으로 보강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기증품 전체 1,488점 중 한국 작가 작품은 1,369점, 해외 작가 작품 119점으로 구성돼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이번 이건희컬렉션의 기증을 ‘세기의 기증’이라고 칭하며, 동서고금을 막론한 통섭형 컬렉션 경향과 기증이 한국 미술사를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평했다. 덧붙여 윤 관장은 코로나19 확산으로 관람객 제한이 생겼다는 점에 아쉬움을 표하며, 내년 3월까지 열리는 전시인 만큼 보다 많은 국민이 찾아와 미술을 향유하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앞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 청주에서 순회 전시를 열면서 서울관과 또 다른 작품 구성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리고 기증 1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과 협력 전시도 개최한다는 계획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