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프리뷰]네마프2021, 자본주의 사회서 예술 노동 의미를 묻다
[현장프리뷰]네마프2021, 자본주의 사회서 예술 노동 의미를 묻다
  • 안소현 기자
  • 승인 2021.08.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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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 등 다양한 매체 통해 예술 노동 의미 재고할 수 있는 자리
여성 관점 영화사 구축 노력

[서울문화투데이 안소현 기자]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수많은 전시장·영화관이 문을 닫았다. 설 곳을 잃은 예술노동자의 수입도 함께 급감했지만 사회적으로 특별한 보호망은 마련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의 노동이 정당한 처우를 받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도 예술은 계속된다. 예술가는 왜 계속 노동할 수밖에 없을까? 예술 노동의 가치는 무엇이며, 우리는 왜 예술을 보호해야 할까? 제21회 서울국제대안영상페스티벌(이하 2021네마프)은 ‘예술과 노동’을 둘러싼 여러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고자 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돈이 되지 않는 ‘대안 예술’을 하는 작가들이 모였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햇빛 속의 모과나무’ (사진=네마프 제공)
▲개막작으로 선정된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햇빛 속의 모과나무’ (사진=네마프 제공)

 
‘창조행위: 영화라는 노동’…빅토르 에리세 <햇빛 속의 모과나무>

이번 2021네마프의 주제전은 ‘창조행위: 영화라는 노동’이였다. 예술 노동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상영작은 ▲마리안느 랑베르의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샹탈 애커만의 영화>, ▲빅토르 에리세의 <햇빛 속의 모과나무>, ▲장 뤽 고다르의 <작은 영화사의 흥망성쇠>, ▲아녜스 바르다의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이다. 

개막작으로는 빅토르 에리세의 영화가 선택됐다. 에리세 감독은 여태까지 장편은 세 편밖에 찍지 않았다. 그중 가장 최근작인 <햇빛 속의 모과나무>는 화가 안토니오 로페스가 모과나무 한 그루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야기는 9월 말부터 이듬해 봄까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된다. 오프닝 크레딧에서는 작업 첫날을 보여준다. 로페스는 작업실을 청소하고 캔버스를 짜면서 하루를 다 보낸다. 준비된 화구와 밀로의 비너스상이 마지막 프레임에 함께 잡힌다. 비너스 상은 영원성과 이상을, 화구는 그리기 노동의 불완전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를 가로지르는 두 축이다. 

▲오프닝 크레딧 마지막 프레임 (사진=유튜브 채널 'SredniVashtar' 제공)
▲오프닝 크레딧 마지막 프레임 (사진=유튜브 채널 'SredniVashtar' 제공)

안토니오 로페스는 완벽주의자다. 작업 환경을 완전히 컨트롤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시점을 고정하기 위해 못 두 개를 땅에 박아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표시해 두고, 흰색 물감으로 모과나무 여기저기에 표시해 나무가 얼마나 처졌는지도 계속 확인한다. 하지만 소음, 방문객 등 일상의 여러 요소가 작업 환경에 계속 개입한다. 화가는 모과나무에 비친 빛을 포착하고 싶어 하지만, 빛은 시시각각 변하고 날씨는 불안정하다. 큰비가 내려 그림이 젖어버리기도 한다. 작가는 캔버스 안에 고요히 응축된 시간을 쌓아올리고자 하나 캔버스 바깥에서는 일상의 소음으로 범벅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간다. 

그렇게 그림의 완성은 계속 지연되고 달력은 계속 넘어간다. 겨울이 오고 모과나무가 시들자 로페스는 결국 작업을 그만둔다. 하지만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화가는 나무와 시간을 보내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무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렇게 나무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화가와 나무 사이에는 관계가 형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복합적으로 담아내는 건 오직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캔버스에서는 시간이 정지하지만, 영화에서는 시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로페스와 모과나무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영화는 둘의 관계를 통해 예술 노동의 지난함과 가치를 함께 담아냈다. 
 
‘재구성되는 영화의 역사’, 미국 및 프랑스 초기 여성 감독 작품 상영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뉴 대안영화 마스터전 ‘재구성되는 영화의 역사’가 진행됐다. 여성의 관점에서 새로운 영화사를 구축해보려는 기획이다. 초기 영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알리스 기-블라셰, ▲제르멘 뒬락, ▲이본느 라이너, ▲도로시 아즈너 등 여성 감독 4인의 작품이 상영됐다. 알리스 기-블라셰(1873-1968)는 처음으로 극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기-블라셰는 흑백 필름에 부분적으로 착색을 하거나, 이중인화를 시도하는 등 다양한 기술을 개발해 영화 언어의 폭을 넓혔다. 유성영화가 등장하기 20여 년 전에 ‘크로노폰’ 시스템을 개발해 무성영화에 사운드를 입히기도 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1898년부터 1907년 사이, 즉 감독이 고몽에서 일했던 시기에 만든 작품 13편이 상영됐다. 평균 5분을 넘지 않는 짤막한 흑백 무성 단편 영화들로 점프컷, 역재생 등의 특수효과를 확인해볼 수 있다.

▲파멜라 B 그린, '자연스럽게: 전해지지 않은 알리스 기-블라쉐의 이야기 (사진=네마프 제공)
▲파멜라 B 그린, '자연스럽게: 전해지지 않은 알리스 기-블라쉐의 이야기 (사진=네마프 제공)

제르멘 뒬락(1982-1942)은 최초의 페미니스트 영화제작자다. 페미니즘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라 프롱드」, 「르 프랑세즈」 같은 페미니스트 잡지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 배우 스타시아 나피에르코프스카와 연애를 시작하고, 이를 계기로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1923년 작인 <미소 짓는 마담 보데>는 여성의 시점이 반영된 초기 영화 중 하나로 평가된다. 중산층 남편에게 환멸을 느끼는 아내의 심리 상태를 왜곡, 중첩 등의 다양한 기법을 통해 그려냈다. 뒬락은 20세기 초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클로드 드뷔시의 곡 ‘아라베스크’에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고 알려진 1929년 영화 <아라베스크>는 서사 없이 시각적 이미지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 빛에 반사된 거미줄 등 다양한 자연물을 통해 시각적 리듬을 형성했다.  

예술가 역할·코로나 시대 불안 등 다양한 주제 아우른 뉴미디어 및 VR 전시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는 뉴미디어시어터전 《나와 너의 몸: 예술가의 조건》과 VR전 《버추얼리얼리티아트전》이 열렸다. 전시 구성이 약간 산만했지만, ‘예술과 노동’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정지수의 4채널 비디오 작품 <아이 러브 유>는 가사노동을 둘러싼 권력과 사랑의 문제를 다룬다. 빨래감, 요리 등 가사 노동을 대표하는 사물들을 손가락으로 애무하듯 어루만지는 장면이 나오는 가운데 “아이 러브 유”라고 속삭이는 여성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온다. 이후 로봇청소기 등 가사 노동을 대신해주는 기구도 등장하나 목소리와 동작에는 변화가 없다. 가사노동은 사랑의 이름으로 요구되며, 사랑하기에 하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랑과 권력의 문제에 대해 여성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김희욱의 비디오 <예술가의 자질>은 ‘예술가 됨’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작업은 스스로 예술가라고 선언하는 한 기러기의 이야기를 전한다. 관객은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구축된 예술가의 이미지에 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해볼 수 있다. 

▲정지수, 'I Love You' (사진=네마프 제공)
▲정지수, 'I Love You' (사진=네마프 제공)

그 외에도 ‘독일 비디오예술 특별전’, ‘아시아/뉴 대안영화전:지금-여기’, ‘한국신작전’, ‘글로컬신작전’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2021네마프는 새로운 영상 언어를 통해 예술가의 노동에 대해 다각도로 숙고해볼 수 있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