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일민미술관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展…반성 없는 힐링?
[기자의 눈] 일민미술관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展…반성 없는 힐링?
  • 안소현 기자
  • 승인 2021.09.06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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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론적 세계관 재해석…팬데믹 이후 불안 달래는 전시
음양오행‧별자리 등 상징 이용, '운명' 개념 공감각적 형상화
예술과 점술 접목한 상담소 운영…자본주의 사회 도덕으로서 '힐링' 넘어서지 못해
유대 형성 성공적, 반성‧통찰 이끌어내는데 미흡

[서울문화투데이 안소현 기자]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미래'를 다루는 전시가 많아졌다.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일 테다. 일민미술관에서 지난 7월 11일까지 열렸던 전시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는 미래를 말하기 위해 과거로 시선을 돌린다. 만사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샤머니즘과 우주론적 세계관을 재해석하여 '운명'의 의미를 고찰하고 '상담'을 통해 내면세계를 깨달아가는 여정을 마련"해 불안을 마주하고자 함이다. 

▲김주리, '일기(一記)생멸(生滅) IV'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김주리, '일기(一記)생멸(生滅) IV'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최근 현대 문명의 토대인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대대적으로 반성하게 되면서 비슷한 방향을 취하는 전시가 다수 등장했다. 우주론적 세계관은 '나'와 바깥 세계가 하나라는 생각에 기반하고 있기에 현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여러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열린 광주비엔날레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2021), 권군 개인전 《빼앗긴 시간은 온다》(보안여관, 2021),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양혜규 - O2&H20》(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0-2021). 지금 생각나는 전시만 대충 나열해도 이 정도다. 기자는 이 많은 전시 중에서도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전에 특별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이 전시의 저면에 타자를 배제하는 경향 역시 은은하게 깔려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양가적 태도를 살펴봄으로써 현재 한국 사회가 그리고 있는 미래상의 일면을 점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 공간에 우주론적 세계관 구현… 불안하고 위태로운 분위기 감지

전시는 '운명'과 '상담소' 섹션으로 구성돼 미술관 1층과 2층에서 각각 진행됐다. '운명' 섹션에서는 음양오행 및 별자리 도상을 활용한 작품들을 전시해 "'운명'이 인생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공감각적으로 형상화한 공간"을 구축했다. 도입부에서 연달아 접하게 되는 김주리, 노진아, 우정수의 작품은 각각 나무(木), 흙(土), 물(水)을 상징한다.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음양오행에 따르면 나무와 흙, 흙과 물은 각각 상극이다. 한쪽에서 존재를 이어가고자 할 때, 다른 쪽에서 가로막는 조합이다. 이 전시 구성에서도 한편으로는 욕망과 생명력이 느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위태로운 분위기가 감지됐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현 상황을 은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진아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와 우정수의 'Calm the Storm'이 나란히 전시됐다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노진아의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와 우정수의 'Calm the Storm'이 나란히 전시됐다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김주리의 <일기(一記)생멸(生滅) IV>(2021)은 작가가 직접 채취한 들풀을 엮어 조성한 가상 풀밭이다.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으로 밀려들어 오는 풀밭은 둥근 가상 달빛 아래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들풀들은 이미 죽어 말라붙은 상태다. 같은 장소에 있다가 이곳으로 소환된 건지도 알 수 없다. <일기생멸>시리즈는 작가가 유럽에서 우연히 발견한 '백묘국'에 영감을 받아 시작됐다. 살아서는 흰빛을, 죽어서는 초록빛을 띠는 식물이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을, 죽은 다음에는 생명을 품고 있는 셈이다. 전시장 안 풀밭 역시 살아있다고 생각하면 죽은 것처럼 보이고, 죽었다고 생각하면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사라졌을 이 덧없는 풍경은 생과 사는 늘 함께하며, 죽음이 있어 생명이 빛을 발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바로 옆에 위치한 노진아의 인터렉티브 조각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2019)에서도 생성과 소멸의 이미지가 뒤얽힌다. 관객이 질문을 하면 흙더미에 파묻힌 인간형 로봇이 답을 해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창세기에 나오는 구절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기를 어긴 아담이 영생을 빼앗기면서 하느님한테 들은 저주의 말이다. 이후 인간은 영생할 수 없게 됐지만, 여전히 영생을 욕망한다. 그 때문에 자신과 닮은 로봇을 만들어 간접적으로나마 생을 이어가려 하기도 한다. 망가지기는 할지언정 죽지는 않는 로봇은 소멸을 전제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게 헛된 꿈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폐기처분돼 삭아가는 것 같은 로봇은 현대 문명의 미래를 예언하는 한편, '감히' 인간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돌아감으로써 인간성에 도전하는 듯하다. 현대 과학기술이 추구하는 미래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었다. 

▲Rembrandt van Rij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ee' (사진=Google Arts & Culture 제공)▲Gustave Doré, 'Jesus Calms a Storm' (사진= Pitts Theology Library Digital Image Archive 제공)
▲Rembrandt van Rij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ee' (사진=Google Arts & Culture 제공)▲Gustave Doré, 'Jesus Calms a Storm' (사진= Pitts Theology Library Digital Image Archive 제공)

우정수의 그림은 종교과 역사라는 거대서사에 도전한다. <Calm the Storm>(2017)은 예수가 갈릴래아 호수의 폭풍우를 잠재운 일화를 그린 대형 회화다. 폭풍우 속에서 사람들은 겁에 질려있다. 물은 생명의 근원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반복해 그은 검고 굵은 선으로 거친 폭풍우와 인물들의 공포를 표현했다. 폭풍을 멈춰야 하는 예수는 후광을 지우고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다. 이 작품은 구스타브 도레의 판화 <예수가 폭풍을 가라앉히다(Jesus Calms the Storm)>(1872-1876)와 렘브란트의 <갈릴래아 호수의 폭풍(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1633)를 레퍼런스로 삼은 듯하다. 원본 그림의 구조를 비틀고 예수의 신성을 지워 자신의 해석을 담아냈다. 회화적으로 종교와 역사가 지향하는 영원성에 도전한 것이다. 메멘토 모리를 소재로 한 <Self Portrait I, II>(2018)과 함께 배치돼 덧없음의 정서를 더욱 분명히 했다.     

별자리 테마 작업…생태적 사고관 드러내며 명상과 휴식의 자리 마련

장종완의 작업은 앞선 작품들이 쌓아 올린 불안감을 이어가면서도, 별자리 테마를 활용해 분위기를 전환함으로써 다가올 작품들로 관람객을 안내한다.  <가죽 회화> 연작은 유토피아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거짓된 느낌을 포착한다. 작가는 유명한 관광지나 자연 풍경 이미지를 수집한 후 이를 동식물 이미지와 결합해 인조 가죽 위에 그려 넣었다. 인류가 꿈꾸는 유토피아 이미지에서 생략된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한편 <팬데믹 별자리> 연작은 별자리로 비인간 동물의 아픔을 기린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인간이 얼마나 많은 동식물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는지 널리 알려졌다. 이 작품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동물들을 별자리로 올려 위로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이렇게 장종완의 작품은 코로나19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전시의 의도를 더욱 분명히 밝히는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 

▲비디오로즈, '달의 정원'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비디오로즈, '달의 정원'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비디오로즈(강현우, 허철주)의 미디어아트 <달의 정원>(2021)은 불안에 마침표를 찍고 치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 작품은 '에스밧'이라는 여사제가 달의 힘을 불러내는 초환의식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달의 영향으로 계절이 변화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생기듯, 세상 만물이 우주를 구성하는 거대한 네트워크의 구성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벽면에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모습이 프로젝션 맵핑 기법으로 그려지는 가운데, 관람객은 영상 앞에 깔린 방석에 앉아 명상의 시간을 가지며 작품의 메시지를 곱씹어 볼 수 있다. 

강호연의 작품도 휴식의 자리를 마련한다. <산장>(2021)은 버려진 장롱과 상자 등을 주워 조립한 작은 오두막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펼쳐진다. 하지만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의 정경이 펼쳐진다. 카메라 옵스큐라 원리를 활용했다. 어두운 방에서 나오면 밝은 <모닥불>(2021)이 기다리고 있다. 조명과 가습기로 만들어낸 가짜 모닥불이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일상용품을 활용해 새로운 쓰임새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기존 의미체계에 변화를 일으키며, 사물의 순환 가능성 역시 제시한다. 사실 강호연의 작업은 그 자체로 전시작 내부에 순환 구조를 형성하기도 한다. 음과 양, 불(火)의 상징을 사용해 다시 음양오행의 맥락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나무를 활용한 김주리의 작업과는 나란히 위치해 상생의 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강호연의 '산장'과 '모닥불'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강호연의 '산장'과 '모닥불'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전시 1부는 음양오행과 별자리 도상을 뒤섞어 동서양의 종교 및 신화가 함께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굳이 왜 이 시점에 우주론적 세계를 주제로 전시를 기획한 것인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운명'이라는 개념에 대해 특별히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고, 원시 종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음양오행과 별자리가 이곳에서 작품들을 연결하는 '상징' 이상의 어떤 역할을 했는지 조금은 의문이 들었다.    

자궁으로 회귀하는 상담소

이러한 의구심은 2층으로 올라가면 더욱더 짙어진다. 전시의 두 번째 섹션 '상담소'에서는 <사주포차>, <오래된 약국 2021>, <오행백신센터>, <본능미용실>, <라 로바의 방-부활>, <오늘의 말씀> 등 작가들이 설치한 상담소가 6개 설치돼 있었다. 해당 프로젝트들은 사주, 타로 등 다양한 형태의 점술 행위를 예술적으로 풀어내 관객에게 위로를 주고자 한다. 하지만 적지 않은 상담소가 가벼운 '힐링' 이외에 다른 의미를 끌어내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상담소' 섹션의 주목적은 "적극적으로 운명에 맞서는 경험"을 끌어내는 것보다는 위로를 통해 고통을 잊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왜냐하면 전시 서문에서 '팬데믹'에 대해 상당 부분 언급했음에도 이 공간에서 반성을 촉구하는 장치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점술과 코로나19가 어떤 연관 관계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전시장은 전염병으로 인한 불안과 우울을 적당히 해결하고 돌아가는 곳처럼 느껴졌다.  

▲노말리티, '오래된 약국 2021'. 관람객이 괴로운 과거를 불태우고 있다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노말리티, '오래된 약국 2021'. 관람객이 괴로운 과거를 불태우고 있다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우주론적 세계는 두 가지 형태로 풀릴 수 있다. 하나는 타자와의 합일의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은 자기 동일성에서 깨어나 바깥 세계로 나가게 한다. 다른 하나는 자궁으로의 회귀, 즉 자기동일성을 강화하는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을 자신의 질서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타자와의 대립을 해소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레트로토피아』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연대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믿던 시대는 끝났으며, 대신 과거의 위대한 사상에서 위안을 찾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인은 위안을 찾기 위해 관계에서 비롯되는 온갖 자극 및 부정적 감정과 거리를 두려 한다.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배우는 까닭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도덕은 "자아로의 회귀"다. 이번 전시가 우주론적 세계관을 주제로 택한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상담소' 섹션에서 점술을 통해 끌어낸 미래상은 "개별화된 외톨이가 겁에 질린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이 절망적으로 잃어버렸던, 되돌릴 수 없는 파라다이스에 대해 갖는 향수"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송지형, '사주포차' & '당신의 운명을 알고 싶습니까'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송지형, '사주포차' & '당신의 운명을 알고 싶습니까' (사진=일민미술관 제공) ©스튜디오 마실

물론 흥미로운 프로젝트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송지형의 <사주포차>(2021)는 '사주'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 자신을 객관화할 기회를 마련했다. 작가는 전시장에서 관람객의 사주를 봐주며 직접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관객은 여기서 형성된 유대를 바탕으로 위로를 받으면서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다. 작품은 또한 다른 이들의 상담 장면을 살펴보며 우리네 삶과 욕망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게 하기도 했다.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는 우주론적 세계관을 재조명해 유대에 기반한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했다. 아마도 꽤 많은 관객이 전시를 통해 위로를 받고 돌아갔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재난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가닿지 못해 새로운 미래상을 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힐링'은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을 한층 강화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반성과 사유를 촉발할 수 있는 장치가 더 마련돼 있었다면 훨씬 더 좋은 전시가 됐을 것 같아 아쉬웠다.   


참고 자료

- 일민미술관 홈페이지 아카이브, https://ilmin.org/archives/?post_types=ima_on, 2021년 9월 6일 접속.

- 지그문트 바우만, 『레트로토피아: 실패한 낙원의 귀환』, 파주: 아르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