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Asian Fusion’과 원융무애(圓融無礙)의 정신성Ⅱ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Asian Fusion’과 원융무애(圓融無礙)의 정신성Ⅱ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21.09.0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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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
▲윤진섭 미술평론가

<지난호에 이어서>
어렸을 적 어머니 곁에서 보고 익힌 패션 디자인에 대한 감각이 훗날 작가로 활동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뿐이다. 홍지윤의 그러한 콜라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비단 패션뿐만이 아니라, 각종 아트 상품 개발을 위한 협업에 이르러 더욱 빛나고 있다.

한국의 동양화는 원래 시와 글씨, 그림이 한 자리에 만나는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선비(Sunbi)* 정신의 발현이기도 하려니와 품격 높은 유교사회의 문화적 전통이기도 하다. 옛날 선비들이 정자에 모여 화선지를 펼쳐놓고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에 곁들여 그림을 그리는 일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수준 높은 품격의 의사 소통방식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의 의중을 떠보고 상호간의 공감대를 찾는 것이다. 사언절구(四言絶句)나 오언율시(五言律詩)와 같은 전통적인 정형시에는 운(韻)이라는 것이 있는데, 압운, 두운 등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공약수와 같은 것이다. 이 운(韻)을 매개로 서로 시구(詩句)를 주고 받으며 상대방의 의중을 떠봤던 것이다.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때로 여럿이 모여 시회(詩會)를 펼치며 문학과 미술, 음악, 무용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종합예술을 일상에서 실현했다. 이른바 기생문화가 그것이다. 

오늘날 홍지윤의 퍼포먼스에는 이러한 공동사회의 전통이 관객참여의 형식으로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검게 칠해진 벽에 형광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면 아이들이 나타나 함께 유사한 행위를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Are you Crazy Honey? - Cosmos is Chaos/Chaos is Cosmos, Video work, [예술의전당 미술과 놀이展], 서울, 2013>

홍지윤 작품의 주된 특징이랄 수 있는 시, 서, 화의 혼합은 한국의 이러한 문화적 전통에서 온 것이다. 지필묵을 기본으로 한 그것은 그러나 조선시대 선비들의 그림처럼 고답적이지 않고 개방적이며, 문인화적 전통에서는 금기시돼 온 형광색을 도입할 만큼 실험성이 강하다. 홍지윤이 아방가르드적 전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전통에의 강한 도전과 반항정신에 기인한다. 특히 여성이 비하되기 일쑤인 한국의 문화 풍토에서 이러한 도발과 저항은 자칫 사회적 도태를 당할 수 있을 만큼 신분상의 위험이 따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홍지윤의 그러한 행위는 차라리 모험에 가깝다. 

그녀의 작품에는 종종 여성의 누드가 등장한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몸일 수도 있지만, 보통명사로서의 한국 여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지긴 했지만, 아직도 한국과 같은 보수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몸을 나체로 드러내는 것은 결코 환영받지 못할 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홍지윤의 작품에는 글씨와 자작시 혹은 대중음악의 가사, 그리고 그림이 한 자리에 등장한다. 

그녀는 약 900편에 이르는 시를 썼다. 그중에서 그림의 주제에 맞는 시를 골라 특유의 서체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곁들인다. 그것은 이제 홍지윤의 트레이트 마크가 되었다. 다수의 추종자들이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으며, 그녀의 서체를 분석한 석사논문도 나왔을 만큼 디자인 분야에서 명성이 높고 또 영향력이 크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앞에서 언급한 순수예술과 생활예술의 경계를 허문 파이어니어로서 홍지윤의 실험정신을 거론한 이유이다.

Ⅱ. 아시안 융합과 예술적 실천
작년에 홍지윤은 그동안의 예술적 성과를 모은 화집을 발간하면서 제목을 다소 거창하게 ‘아시안 융합(Asian Fusion)’이라고 붙였다. 그녀의 야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왜 그랬을까? 은연중 떠오르는 생각은 서구적인 것에 대한 강렬한 ‘안티(anti)’이자, 거꾸로 서구에서 발원한 현대적인 것의 과감한 수용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녀의 강렬한 문화적 흡인력과 못 말리는 친화력은 이질적인 요소조차 내 것으로 만드는 강력한 실험정신,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아방가르드적 도전정신으로부터 나온다. 그 정신의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퓨전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