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태평무 ‘신명무’(新名舞) 탄생의 신호탄
[성기숙의 문화읽기]태평무 ‘신명무’(新名舞) 탄생의 신호탄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1.10.2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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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중견 전통춤꾼들의 ‘유쾌한 반란’이 점화됐다. 최경자, 김기화, 김경숙, 임성옥, 전은경(공연 順) 등 다섯 명의 춤꾼이 ‘태평무 프로젝트 5人’으로 뭉쳤다. 그들이 주최한 <태평무 5人의 아이콘과 코드>(2021년 10월 20일, 한국문화의 집 코우스)는 주제가 있는 공연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지하듯이, 태평무의 창안배경엔 예사롭지 않은 내력이 숨어있다. 명무 한성준(韓成俊, 1874~1941)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을 태평무에 담아냈다. 나라의 태평성대를 주제로 한 태평무는 원래 조선의 왕과 왕비를 상징하여 만든 2인무 형식이었다. 당시 일본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복색을 착용할 수 없게되자 한복에 신라시대 관을 착용하고 춤춰야하는 아픈 역사가 있다.

한편, 태평무 전승과 관련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우선 한성준은 타계하기 전 손녀딸 한영숙에게 조선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복색을 제대로 갖춰 입고 춤추라고 당부했다. 또 자신이 세상을 뜨면 태평무 의상으로 수의를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태평무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음을 짐작케 한다.

한성준이 창안한 태평무는 후속세대로 전승되면서 여러 유파로 갈래화되었다. 이번 <태평무 5人의 아이콘과 코드> 공연을 통해 현존하는 태평무 각 유파에 깃든 고유의 특성과 춤미학을 엿 볼 수 있었다. 한영숙류 태평무, 강선영류 태평무, 이동안류 태평무 등 세 가지 유파의 춤이 무대에 올랐다. 

우선 최경자, 김경숙, 전은경 등 세 명의 춤꾼이 한영숙류 태평무를 선보였다. 첫 주자로 나선 최경자는 국립국악원무용단에서 30여년 봉직한 춤의 내공을 명징하게 드러냈다. 맺고 풀고 얼르는 춤사위가 고운 자태로 표현되었다. 한성준-한영숙-손경순으로 이어진 태평무 줄기의 속 살을 살필 수 있었다.  

한성준-한영숙-이애주로 전승된 한영숙류 태평무를 선보인 김경숙은 단아하고 정갈한 춤태로 중고제 전통춤의 속 깊은 멋을 살렸다. 한영숙류 태평무의 또다른 갈래인 한성준-한영숙-정재만 계보선상의 정점에 있는 전은경은 정교한 세련미를 곁들인 정중동(靜中動)의 움직임으로 관객의 시선을 압도했다. 한영숙류 태평무를 선보인 세 명의 춤꾼은 검증된 실력의 소유자답게 중고제 전통춤 고유의 미감을 깊은 연륜으로 담아냈다. 완숙미가 넘쳤다.  

다소 결을 달리한 임성옥, 김기화의 무대도 인상적이었다. 한성준-강선영의 태평무 맥을 잇는 임성옥은 경쾌하고 활달하면서도 절도있는 춤동작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다듬어진 인위성을 배제한 임성옥의 텁텁하고 질박미 넘치는 춤사위에서 강선영 태평무에 담지된 ‘본디 그 모습’의 전형을 엿본다. 한마디로 값진 ‘재발견’이었다.

김기화가 선보인 이동안류 태평무는 재인계통으로서 희소성이 돋보였다. 마을 원님이 풍년을 축복하는 의미로 추었던 화성재인청 태평무로 극장무대화 이전 맹아적 요소가 내재돼 있음이 이색적이다. 김기화는 재인계열의 호방한 기질과 해학성 혹은 낙천성을 곁들인 특유의 멋과 신명으로 관객의 흥취를 견인했다. 

<태평무 5人의 아이콘과 코드> 무대에 오른 다섯 명의 춤꾼은 60년대 생(生)으로 모두 80년대 학번에 속한다. 세대론적으로 볼 때 제3세대(또는 제4세대)에 해당된다. 대부분 유년기 춤에 입문하여 제도교육의 최상위 단계인 대학의 무용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춤아카데미즘을 경유한 최고 엘리트이자 프로페셔널한 춤꾼이라 할 수 있다.

제3세대(또는 제4세대)의 전통춤 학습내력은 다층적이다. 전통시대 통용된 도제식과 근대 제도교육이 혼재된 방식으로 춤을 배우고 연마했다. 맹목적 전수와 답습을 통한 숙련된 기량의 과시에서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법으로 춤사위의 원리와 미학적 특성을 해석하고 내재화하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점도 반갑다.

한성준 춤매소드의 특징은 제자이자 손녀딸인 한영숙에게 남긴 어록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지상과 우주가 교통하는 기운으로 춤을 춰야 하고, 뼈 삼천마디를 움직여 춤추라고 강조했다. 한성준 계보선상에 있는 전통춤꾼이라면 곱씹어야 할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다섯 명의 중견춤꾼들의 태평무 무대를 통해 한성준의 춤철학과 정신의 요체를 새삼 재음미하는 기회였다. 

알다시피,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은 20세기 전통춤의 패러다임을 바꾼 춤의 선구자다. 마당이나 뜰에서 추어지던 우리 춤을 서구식 극장무대에 양식화하여 새로운 공간미학을 투영했다. 그 결과의 산물이 바로 태평무다. 태평무는 일찍이 문화유산적 가치가 인정되어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다. 강선영류 태평무가 1988년에 지정됐고, 지난 2019년 한영숙류 태평무가 이에 합류했다. 현재 태평무 이수자는 수백 명에 달한다. 가장 인기있는 무형문화재 종목답게 전승자(이수자)들의 경쟁 또한 치열한 편이다. 

<태평무 5人의 아이콘과 코드>는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지원하는 2021년 이수자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개최된 공연이다. 태평무에 대한 미시적 접근으로 여타의 이수자 지원공연과 차별화를 모색하여 관심을 모았다. 기존의 이수자 지원공연이 대개 ‘종합선물세트’식 이라면, 이번 공연은 태평무에 선택 집중하여 이른바 ‘톺아보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덧붙여, 창안자 한성준에서 후속세대로 분화된 태평무 고유의 춤미학이 각 유파별로 어떻게 다른지 한 무대에서 비교 감상해 보는 흥미로운 무대였다. 아울러 우리시대 태평무의 ‘신명무’(新名舞) 탄생을 알린 신호탄이 되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