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동성애자 차이코프스키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동성애자 차이코프스키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1.10.2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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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전 MBC 음악PD.

현대 생물학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의 일부 개체에 나타나는 동성애 성향이 “옳다, 그르다” 또는 “좋다, 나쁘다”는 도덕적 잣대로고 판단할 수 없는 선천적 특징임을 밝혀냈다. 동성애자도 동등한 시민권자로 존중받아야 하며, 남한테 폐를 끼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삶을 영위할 권리를 가져야 마땅하다. 

2010년, MBC에서 <W>라는 국제시사 프로그램을 맡았을 때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아르헨티나를 취재한 적이 있다. 크리스티나 대통령이 카톨릭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 법안에 서명한 직후였다. 내가 만난 세 커플은 한결같이 행복해 하며 인터뷰에 응했다. “아이를 낳을 것도 아닌데 왜 결혼을 원하는 거죠?”라고 묻자 그들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결혼 안 할 자유와 결혼할 자유를 (이성애자와) 똑같이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시민권을 제한하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취지였다. 카메라 앞에서 애정 표현을 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들은 서슴없이 다정하게 키스를 나눴다. 이성애자의 키스와 똑같이 마음이 담긴 자연스런 행위였다. 

'멜로디의 천재' 차이콥스키(1840~1893)는 동성애자였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법대 시절의 동창부터 만년에 사랑한 조카 다비도프까지 평생 동성애자의 정체성을 지울 수 없었고, 이 때문에 괴로워했다. 19세기 러시아는 동성애자를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야 할 죄인으로 간주했고, 차이콥스키도 이를 도박이나 마약 같은 '몹쓸 습관'이라 여기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차이콥스키의 모든 사랑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이 점은 그의 음악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의 첫 관현악 작품인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부터 원수 집안 젊은이들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그렸다. 

차이코프스키의 인생에 개입한 두 명의 여성이 있다. 먼저, 모스크바 콘서바토리 시절의 제자 안토니나 밀류코바(1848~1917)다. 차이코프스키는 1877년 그녀와 결혼했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에게 편지를 보내 “당신을 알고 있는 이상 다른 남자는 보고 싶지도 않고, 당신 성격의 결점이 뭐든 제 사랑을 멈출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그녀를 타일러서 보내려 했지만 “자살하겠다”는 위협에 마음이 약해졌다. “내가 뭐 잘났다고 젊은 여성을 죽게 만드나?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 결혼하자”, 이런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결혼을 계기로 동성애라는 몹쓸 습관을 고쳐보자”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결혼을 하자 죽고 싶어진 건 자기 자신이었다. 동생 아나톨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차이코프스키는 “그녀가 파충류처럼 끔찍하다”고 몸서리쳤다.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안토니나와는 단 하루도 같이 보내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녀를 어떻게 없애버릴 수 있겠는가? 방법은 하나, 내가 사라져야 한다.” 그는 모스크바의 차가운 네바강에 뛰어들었는데, 몸살에 걸렸을 뿐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이혼 소송으로 갈 경우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녀와 법적 이혼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집을 가출하여 스위스로 도피하는 길을 택한다. 안토니나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은 뒤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1917년 세상을 떠났다.  

또 한명은 차이코프스키의 영혼에 안토니나보다 더 깊은 흔적을 남겼다. 철도 재벌의 미망인으로 엄청난 거부였던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이다. 그녀는 1876년 차이코프스키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싶다고 밝히며, “절대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두 번 마주쳤는데,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지나쳤다. 폰 메크 부인의 편지는 처음에는 사무적인 투였지만, 갈수록 속마음을 담게 된다. “당신의 음악을 들을 때면 당신에게 완전히 굴복합니다. 당신은 제겐 신 같은 존재예요.” 차이코프스키도 그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제 영혼이 힘닿는 데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제 인생으로 불러온 운명을 매 순간 축복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교향곡 4번 F단조를 ‘우리들의 교향곡’이라고 부르며 기뻐했다.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한 교향곡 5번 E단조가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자 부인은 따뜻하게 위로해주었다. 그는 <1812년 서곡>(1882)이 형편없는 작품이라며 우는 소리를 했고, 그녀는 이때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피아노곡 <사계>를 잡지 ‘누벨리스트’에 연재할 때는 “팬케이크를 굽듯 기분 좋게 작곡하고 있다”고 즐거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안토니나로부터 탈출하여 스위스에서 요양할 무렵, 부인은 연금을 6천 루블로 올려주었는데, 이는 고급 공무원 연봉의 세 배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차이코프스키와 폰 메크 부인의 우정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볼 수 있는 19세기 러시아의 낭만적 사랑, 그 전형이었다.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이 일방적으로 시작해서 일방적으로 끝난 건 비극이었다.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에게 주던 연금을 1890년 갑자기 중단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편지 교환이 멈추면서 우정마저 사라졌고, 차이코프스키는 자존심에 치명상을 입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어릴 적 ‘유리로 만든 아이’처럼 극도로 섬세한 어린이였다. 그는 친절하고 쾌활했지만 이미 조울증과 간질 증세를 보였다. 10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에 들어갔는데, 어머니를 태운 채 멀어져 가는 열차를 절망적으로 울부짖으며 쫓아갔다. 어머니가 자기를 두고 떠난 이 순간은 그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차이코프스키에게 폰 메크 부인은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의지한 벗이었다. 그녀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 버림받았을 때 입은 트라우마를 건드렸기 때문에 치명적이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끝난 순간부터 차이코프스키는 급속히 노화가 진행됐고, 1893년 11월 죽기 직전까지 폰 메크의 이름을 부르며 분노하고 원망했다. 폰 메크 부인도 차이코프스키가 세상을 떠나고 두 달 뒤인 1894년 1월 사망했다. 두 사람이 교류를 중단한 1890년 무렵부터 그녀는 몹시 아팠고, 한쪽 손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가 없는 세상을 견뎌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1876년부터 1890년까지 14년 동안 두 사람이 주고받은 천여 통의 편지는 차이코프스키 연구의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차이콥스키는 마지막 작품인 교향곡 6번 <비창>의 초연을 지휘하고 9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 페테르부르크 법대 동창의 아들과 사랑한 사실이 세상에 폭로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수치스럽게 여긴 동창들이 명예재판을 열어서 음독자살을 강요한 것이었다. 비창을 작곡할 때 그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 곡의 피날레는 ‘아다지오 라멘토조’, 즉 ‘느리게 탄식하듯’이다. 19세기 교향곡에서 피날레를 힘차고 당당한 투티 대신 이렇게 비탄과 통곡, 한숨과 탄식으로 우울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차이콥스키는 쓰디쓴 사랑의 좌절로 점철된 자기의 삶을 아름다운 멜로디로 승화시켜 우리에게 수많은 걸작을 남겨줬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이 어렵게 느껴지는 분에게 발레 음악은 그의 음악에 접근할 수도 있는 훌륭한 지름길이다. 고전 발레의 최고봉인 <백조의 호수>(1876)은 발레 음악을 교향곡 수준으로 끌어올린 걸작이다. 이 작품이 초연 당시 흥행에 실패했다는 건 커다란 아이러니다. 음악이 너무 두드러져서 발레에 집중할 수 없다는 평가가 나온 것이다. 17세기 프랑스 궁정에서 탄생한 발레는 무대 위의 춤동작이 우선이고, 음악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보조수단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발레 음악은 오페라나 교향곡에 비해 한 단계 수준이 떨어지는 음악으로 간주돼 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교향곡 수준에 이르는 뛰어난 음악 때문에 당시 청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2005년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발레단이 이 작품을 공연할 때 취재를 간 적이 있다. 지휘를 맡은 아그레스트에게 “어떤 점에 초점을 둬서 지휘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발레와 잘 어우러지게 음악의 호흡을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음악 자체가 교향곡처럼 관객들에게 직접 다가서도록 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고 대답했다. <백조의 호수>는 지크프리트 왕자와 오데트 공주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공주는 악마 로트바르트의 마법에 걸려 낮에는 백조가 되고 밤에만 인간으로 돌아오는데, 왕자의 참된 사랑만 이 마법을 풀 수 있다. 호수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을 맹세하지만, 왕자가 악마의 딸인 오딜르를 오데트로 착각하고 청혼을 하자 오데트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오데드가 백조로 변하여 호수로 사라지자 지크프리트 왕자는 호수에 뛰어들어 빠져 죽는다.* 발레의 고전인 <백조의 호수>조차 차이코프스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 지크프리트 왕자가 악마 로트바르트를 죽이자 마법이 풀려서 오데트가 사람이 되는 해피엔딩으로 연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낙관적인 결말을 선호한 소련 체제에서 개작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동성애자들은 억압과 배제를 겪었기 때문인지 예술적 감성이 이성애자들에 비해 예민한 경우가 많다. 아르헨티나에서 내가 만난 동성애자 커플들도 그러했다.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뜨거운 이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TV토론에서 기독교의 표를 의식해 "동성애자를 반대한다"고 발언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차별에 반대한다”며 서둘러 무마에 나섰지만, 동성애자들은 자기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듯한 좌절과 슬픔을 맛본 뒤였다. 돼지 흥분제로 강간을 모의한 자가 “동성애자들을 엄벌하겠다”고 말한 것은 너무 저급하니 대꾸할 가치가 없다. 좀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정치인이라면 소수자의 아픔을 위로하고 함께 해야 옳지 않을까?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민주주의 전체의 문제다.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해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기보다, 용감하게 진실을 얘기하고 반대자를 설득하는 감동의 리더십을 보여 주어야 한다. 동성애자를 대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은 차이코프스키가 살았던 19세기 러시아보다 그리 나아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