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충무로야사] -브람스다방과 시나리오작가들-
[연재 충무로야사] -브람스다방과 시나리오작가들-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10.01.0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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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1970년 작 '명동백작'
스카라극장은 일제시대 때 와카쿠사(若草)극장 이었는데 8.15해방을 맞으면서 수도(首都)극장으로 개명했다가 한국전쟁 이후 스카라극장으로 다시 바뀌었다.

와카쿠사극장 시절엔 길 건너편에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의 라이벌 역할을 했던 협객 김동회가 하던 양복점이 있었고, 60년대 영화 ‘태양의 거리’를 연출했던 김화랑 감독 부인이자 유명 여가수였던 신카나리아가 운영한 ‘카나리아 다방’이 있었다.

스카라극장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을 빠져 중부경찰서 쪽으로 가다보면 초막집이라는 대포집과 브람스다방이 마주보고 있었고 이 다방이 바로 시나리오 작가들의 집합소였다.

이 무렵 필자는 김하림군과 어울려 다니다가 어느새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있었다. 내가 김하림군과 공동집필한 작품은 ‘4월이 가면’을 비롯해 ‘비내리는 명동거리’, ‘명동백작’등 벌써 10여편 가까이 되었지만 나는 시나리오 대본이나 영화 포스터 혹은 영화 자막에 굳이 내 이름을 삽입하지 않았다.

기왕 시나리오 작가로 출발할 바에야 당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센세이셔널한 작품으로 공동집필이 아닌 단독집필로 데뷔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 쓴 시나리오가 ‘차도에서 비틀거리다’라는 딴에는 매우 엉뚱하고 문제적인 소재였다.

당시 몇몇 예술지향적인 감독들은 매우 신선하고 이채롭고 독특한 신인작가가 나왔다고 열광하며 다투어 연출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영화사와 지방배급업자들은 “이게 무슨 시나리오냐,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며 냉담한 반응이었다.

나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석양과 새벽사이’, ‘아무도 모르게’, ‘야회’등 10여편의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사에 의뢰했지만 번번이 퇴자를 맞았다.

“이런 시나리오는 50년 후에나 써라. 이런 시나리오 영화화하려면 프랑스나 러시아, 일본 영화계로 가라.”
이런 과격한 면박만 되돌아왔다.

김하림군도 “야! 영화가 무슨 문학이냐? 철학이냐?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그런 시나리오를 쓰라구! 괜히 개폼 잡지 말고”

나는 발끈해서 “뭐야? 이자식이!”

김하림군과 나는 치고 박고 난투극까지 벌였다.

그리고 나는 녀석과 시나리오와 다시 결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돈암동으로 돌아가 소설습작에 몰두했다.

그런 일이 있고난 후 한 달 쯤 지났을까, 신상옥 감독과 임권택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하다가 신인 감독으로 데뷔하겠다는 윤정수라는 사람에게 전화 한통이 날라왔다.

당장 만나자고 했다. 내가 쓴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자신과 상당히 호흡이 맞을것같아 데뷔작을 의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고료도 달라는 대로 주고 좋은 소재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계약을 해주겠다는 거였다.   게다가 창덕궁 앞 운당여관에 조용한 방까지 예약해 놨다는 것이었다.

운당여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장안의 명소 중 명소로써 창극으로 유명했던 박귀희씨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도시개발계획에 밀려 남양주 한국영화종합촬영소에 옮겨져 그대로 복원되어있다.

당시 운당여관은 최금동, 임희재, 신봉승, 김지현, 김강윤 등 대가급 시나리오 작가에게만 집필 장소로 특별히 예우해주던 곳이었다.

윤정수 감독은 곱슬머리에 키가 작달막하고 헐렁한 염색군복차림으로 감독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인상이었다.

그는 작품성도 있고 흥행도 될 수 있는 뭐 좀 참신한 소재 없냐면서 영남출신답게 첫마디부터 반말투였다.

눈물짜기 신파극 멜로도 좋고, 통쾌하고 화끈한 액션 시나리오도 좋고 다 좋은데, 코미디만은 하고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기대한 것과 달리 흥미가 반감되어서 별로 탐탁지 않게 구상하고 있던 액션극과 멜로극에 대한 몇 가지 모티프를 제시했더니 그는 액션극소재 중 ‘친구’라는 소재가 자신이 바로 찾던 컨셉트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장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잠시 후 덩치가 크고 잘생긴 중년사내 두사람이 나타났다. 언뜻 보기에도 왕년에 한가닥씩 했던 주먹패냄새가 물씬 풍겼다. 후에 안 일이지만 한사람은 명동파 보스 이화룡 밑에 있던 중간 보스 김아무개였고 또한사람은 광주와 목포 등에서 꽤 알려진 주먹패 중에 한사람이었다.

그들은 감독의 소개로 나와 잠시 수인사를 나눈 후 다른 자리로 가서 감독과 한동안 무언가 숙의하더니 다시 내자리로 돌아와서 “잘해보자구! 흥행만 잘되면 보너스도 두둑이 줄테니”하며 당좌수표 한장을 꺼내주고 다방을 나갔다.

지금 액면으로 환산하면 한 500만원 정도 되는 액수였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청년 한 패거리가 떠들썩하니 몰려들어왔다. 그 틈에 김하림군도 섞여 있었다.

“야! 너 여기 웬일이야?”

김하림군은 내게 반갑게 아는 체했다. 그들은 감독이라는 친구와도 잘 아는 듯 반갑게 악수를 했다.

후에 안 이야기지만 그들은 당시 잘 팔리고 패기만만했던 유명 작가그룹으로 한국 영화의 선각자인 윤봉춘 선생의 장남이자 영화 ‘살으리랏다’ 각본으로 모스코바영화제에 작품상을 수상했고 임권택 감독의 흥행출세작인 ‘장군의 아들’ 등 시나리오 100여편을 쓴 윤삼육과 그의 선배인 한우정, 이대호, 동료인 허진, 이종호 등 시나리오 작가 협회의 주축들이었다.                  
 
(정리/조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