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성기숙 교수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고 소신과 신념으로 나아갈 것”
[Special Interview]성기숙 교수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고 소신과 신념으로 나아갈 것”
  •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김재성 작가
  • 승인 2021.11.18 16: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대 전통가무악 거장이자 ‘문화 독립투사’ 한성준 및 내포 전통춤 정신문화적 가치 창출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 주축, 공연ㆍ학술포럼 통해 한국 근대 전통무악 전파 노력
이달 초, 연낙재 무용학술총서 4권 연달아 발간
한국 역사 속 정치ㆍ문화ㆍ 사회ㆍ경제 아우르는 ‘한국무용통사’ 집필 목표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김재성 작가]“3000마디의 뼈가 움직여서 춤이 되느니라” 5000년 역사를 면면히 내려온 우리 몸짓을 이 시대에 되살려낸 한성준(韓成俊,1874∼1941) 선생이 평소 지녔던 춤에 대한 지론이다. 그는 민중이나 백성으로 표현되는 모든 사람들이 본래 지니고 있는 감성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춤이라 했다. 고상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민중이나 백성으로 표현되는,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한성준 선생이 정리한 승무를 비롯한 살풀이춤, 태평무, 학춤에 그의 사상이 오롯이 녹아 있다. 

우리 춤의 뿌리이자 아버지로 불리는 한성준 선생은 단지 순수 전통춤 계열뿐만 아니라 창작의 지평에까지 영향을 미친 화수분과 같은 존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성기숙 교수는 1990년대 초ㆍ중반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전국의 굿판과 농악, 민속예능판을 현지조사하다가 한성준 선생의 춤에 제대로 빠지게 됐다. 이후 한성준 선생의 춤에 담긴 1930년대 ‘시대정신’을 전하기 위해 탄생 140주년을 맞던 2014년, 한국춤문화유산기념사업회(대표 성기숙 교수)는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과 한성준예술상을 제정한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김재성 작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김재성 작가

성 교수는 우리 춤의 뿌리이자 아버지라 불리는 한성준 선생의 예술사적 업적과 춤 정신을 반추해 문화유산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미래 춤 유산으로 물려주고자 공연과 더불어 학술ㆍ기록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이달 초, 한국춤문화유산기념사업회는 사업의 일환으로 4권의 단행본을 연달아 발간했다. 이번에 출간된 단행본은 2020년 제7회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 ‘중고제 전통가무악 복원 및 기록화’를 목적으로 시도된 결과물을 묶은 것이다. 발간된 책 중에는, 송방송 선생의 생애 마지막 저작 ‘일해 송방송 교수의 자서전, 음악학자 일해(一海)의 학문인생’과 중고제 국악명인 심상건 가(家) 사람들의 삶과 예술을 다룬 ‘태평양 건너 그들이 있었네’, 중고제 국악명인 심상건 가(家)사람들의 삶과 예술도 포함돼 있다. 

성기숙 교수는 한성준 선생을 “승무와 태평무, 살풀이춤 등 오늘날 대중에게도 익숙한 한국 최고 전통춤을 창안하고 이를 집대성하고 무대양식화 하여 계승한 것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우리춤 보존과 후진 양성에 힘썼던 ‘문화 독립투사’”라 말한다. 한성준 선생의 춤에 천착해온 성 교수는 자연스레 그의 발자취를 따르며 신념마저 닮아가고 있다.

곧을 직(直)을 마음에 새기고, 교수로서 그리고 무용학자로서 소신과 신념으로 소임을 다하는 성기숙 교수를 만나 한성준 선생의 춤 세계에 몰두하는 이유와 연구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물었다.

내포 출신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의 예술적 업적과 중고제 전통가무악을 조명해온 한국춤문화유산기념사업회는, 사업의 일환으로 4권의 단행본을 연달아 발간했다. 책 4권이 어떻게 같은 시기에 나오게 됐나.

지난 2014년은 한성준 선생의 탄생 140주년이었다. 한국춤문화유산기념사업회는 우리 무용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남다른 거장을 집중적으로 조명해보고자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을 창설하게 됐다. 그런데 원로부터 중견까지 한성준의 후속 세대가 잇고 있는 춤들은 거의 무대에 올려졌다고 여겨진다. 이에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 고민하게 됐다.

지금까지는 무용사(史) 속 한성준의 위치 바로 세우기와 포괄적인, 통시적 관점에서의 접근이었다면 이제는 미시적으로 세분화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번에 출간된 단행본은 2020년 제7회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 ‘중고제 전통가무악 복원 및 기록화’를 목적으로 시도된 결과물을 묶은 것이다. 우리 춤의 정신 문화적 가치 창출을 화두로 공연·학술·기록을 표방해온 그간의 활동이 오롯이 담겨있다. 

▲연낙재 무용학술총서 단행본 4권
▲연낙재 무용학술총서 단행본 4권

발간된 책 가운데 첫 번째로 나온 ‘일해 송방송 교수의 자서전, 음악학자 일해(一海)의 학문인생’은 송방송 선생의 생애 마지막인데, 이 책을 출간한 소감이 궁금하다.

제6회 한성준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국악학자 송방송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가 자신의 학문세계를 조망한 자서전이다. 책은 송방송 교수가 배재학교를 마치고 서울대학교에서 국악이론을 전공한 후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캐나다 맥길대학교 음대교수로 재직하던 중 35세에 최연소 국립국악원장에 발탁되어 귀국하기까지를 다룬다. 또한 영남대 국악과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 신설의 산파 역할을 하며, 교육과 연구에 전념한 학자로서의 삶을 정리했다. 한국음악사학회 창립을 통한 후진양성 및 학술활동의 면면을 촘촘히 적고 있다. 책에는 한국음악학의 학문적 발전을 향한 외길 인생이 일해음악학(一海音樂學)으로 정립됐음을 증거하는 내용들이 즐비하다. 

한성준예술상은 수상자가 무용가일 경우에는 단독 공연 무대를 마련하고, 학자일 경우에는 학문 세계와 업적을 조명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송방송 선생의 경우, 원래는 그간 발표했던 무용 관련 수많은 논문을 집성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작년 여름 송방송 선생이 교통사고로 몇 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사고로 3~4개월 책 작업도 진척이 되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댁 근처로 찾아 뵈었는데 기존에 계획했던 작업 대신에 본인의 일대기를 정리하면 어떻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과거 『한국음악사학보』에 자신의 일대기를 연재했던 내용을 수정ㆍ보완해 자서전으로 출간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히셨다. 나 또한 그것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책의 주제가 바뀌게 됐다. 이 말씀을 하실 당시, 내 손을 잡고 눈물을 보이셨다. ‘평생 나를 위해 헌신적으로 조력한 아내를 위해 마지막 선물을 남기고 싶다’라고 하시더라. 

안타깝게도 지난 8월 선생의 타계로 인해 이 책은 선생의 생애 마지막 저작이 됐다. 선생께서 너무 일찍 타계하시는 바람에, 작년에 했던 작업에 더욱 의미가 부여됐던 것 같다. 생전에 이런 작업을 해서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한국음악학에 끼친 업적을 후학, 사회에 널리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의 자서전을 통해 스스로는 진정 ‘나에게로 귀환’하는,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기회였다.  

중고제 국악명인 심상건 가(家) 사람들의 삶과 예술을 다룬 ‘태평양 건너 그들이 있었네’는 연낙재에 소장된 자료 외에 직접 미국 현지 조사를 통해 완성됐다. 쉽지 않았을 집필 과정을 거치며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90년대 초,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할 당시 전국의 전통무용가, 예인을 조사하게 됐는데 어딜 가든 듣게 되는 이름이 한성준과 심정순이었다. 충남 서산 출생 심정순과 그의 집안은 구한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5대에 걸쳐 7명의 명인을 배출한 최고의 국악 명문가로 손꼽힌다. 

또한 심상건(1889~1965)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심정순 밑에서 성장하면서 그의 기예를 물려받아 일가를 이룬 전통예인이다. 가야금병창, 가야금산조, 기악 등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1920년대 중반 서울 무대에 입성해 공연, 방송 출연, 음반 취입 등을 활발히 하다 1947년 조택원무용단 일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약 3년간 미 전역을 순회공연했다. 조택원의 신무용 명작 '신노심불로'는 심상건의 장고가락에 영감을 얻어 창작돼 미국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초연됐다. 그들의 활동은 한국 음악사뿐만 아니라 근대 신무용(新舞踊)의 지평 확산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또한 해방 이후 해외에 진출한 최초의 국악인이라는 점도 주목케 한다.

격동의 시기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남다른 삶이 숭고하게 다가왔고, 이를 객관적 자료를 통해 후대에 알리고 싶었다. 

이 책은 지난 2018년 10월 31일부터 11월 9일까지 미국 현지조사를 통해 수집, 정리한 중고제 국악명인 심상건 가(家) 예인들의 삶과 예술을 담아냈다. 미국 현지조사에서 발굴, 수집된 미공개 자료와 미(美) 전역에 흩어져 사는 심상건 후손들에 대한 현지조사 과정에서 촬영된 사진자료 등을 화보로 구성하여 가독성을 높였다.  

▲최근 발간한 에 대해 설명하는 성기숙 교수 ⓒ김재성 작가
▲최근 발간한 ‘태평양 건너 그들이 있었네, 중고제 국악명인 심상건 가(家) 사람들의 삶과 예술’에 대해 설명하는 성기숙 교수 ⓒ김재성 작가

내포 출신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의 예술적 업적을 수십 년째 탐색해온 그간의 노력들이 ‘내포학춤ㆍ내포바라춤 원형 탐색과 복원 연구의 여정’으로 결집됐다. 한성준의 내포학춤ㆍ내포바라춤의 이론과 실기의 지평 융합에서 나아가 무용학자로서 하나의 과업을 이뤄낸 느낌인데, 책이 주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복원(復元)이란 상실됐거나 인멸 과정에 있는 것들을 되살리는 작업으로, 과거의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복원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전통예술의 복원작업은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한성준이 창안한 내포학춤ㆍ내포바라춤의 복원작업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하여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창작방법 그리고 공연활동과 예술성 등을 폭넓게 분석하여 본래 모습의 ‘결’을 찾아가는 것으로 방향을 설정했다. 

한성준의 내포학춤ㆍ내포바라춤 복원작업은 1930년대로 회귀하여 당시 신문ㆍ잡지자료 및 연낙재 소장자료를 꼼꼼히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지난 10여 년간 한성준을 화두로 치러진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과 내포제 전통가무악의 가치 재발견 행사를 통해 집적된 다양한 공연자료가 중요한 전거(典據)로 활용됐다. 아울러, 내포학춤ㆍ내포바라춤 음악복원을 위한 학술고증은 중진 국악학자 이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맡았고, 연주를 통한 실제 음악복원 작업은 국악계의 최고 실력자 원일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이 참여했다. 최고의 전문가들이 참여함으로써 원형 탐색 및 복원에 더 무게가 실린다고 여겨진다. 

출간된 책들은 인문적 접근을 통한 한성준의 내포제 전통춤 원형 탐색 및 복원 연구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고문헌을 비롯해 근대 신문·잡지자료 및 연낙재 소장자료가 대거 활용됐고, 기초자료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해석은 논증의 선명성을 배가했다. 희소성이 돋보이는 각종 공연자료 및 수백 건에 달하는 각주와 참고문헌은 향후 이 분야 연구에 좋은 길잡이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수많은 연구 가운데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을 집중 조명하는 일에 특히 매진한 만큼, 한성준 선생에게 받은 영향 또한 클 것 같다.

한성준은 근대이후 한국 전통춤의 시원적 존재이자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단지 순수 전통춤 계열뿐만 아니라 창작의 지평에까지 영향을 미친 화수분과 같은 존재다. 한성준을 제외하고 한국 근현대무용사는 성립될 수 없다. 나는 1990년대 초ㆍ중반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전국의 굿판과 농악, 민속예능판을 현지조사하다가 한성준의 춤에 제대로 빠지게 됐다. 전국 어디를 가든 ‘한성준’이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월간 ‘무용’에 한성준 발굴기사를 연재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98년 9월에는 문화체육부로부터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한성준 선생에 관한 집필 의뢰를 받게 됐다.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나로선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성준 선생은 내 이력의 변곡점에 항상 함께 하셨다. 

한성준 선생은 승무와 태평무, 살풀이춤 등 오늘날 대중에게도 익숙한 한국 최고의 전통춤을 창안하고 이를 집대성하고 무대양식화해 계승한 것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우리춤 보존과 후진 양성에 힘썼던 ‘문화 독립투사’이다. 암울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것과 비교하면, 우리는 지금 얼마나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가. 선생의 발자취는 나로 하여금 학자로서 투철한 사명감과 신념을 가질 수 있는 귀감이 됐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학자로서 어떤 일,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깨움과 교훈을 던져주셨다. 

▲1987년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가 한풀이춤을 추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1987년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이애주 전 서울대 교수가 한풀이춤을 추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지난 5월 이애주 교수 별세 후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에 쓴 글이 ‘고인에 대한 관심과 깊이가 녹아 있다’는 평을 남기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글을 쓸 당시의 심경이 궁금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 그리고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을 지내며 작년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기에 그의 별세 소식은 문화계 안팎을 놀라게 했다.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충격이었다. 이애주 선생은 격동의 시기, 보기 드물게 시대정신을 구현함으로써 무용계의 자존을 세운 무용가이다.

이애주 선생은 1987년 7월 9일, 반정부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고 숨진 연세대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한풀이춤을 추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피로 얼룩진 무명 치마저고리 차림의 절규하는 몸짓은 민중들의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나 또한 그곳에서 이애주 선생을 처음 뵈었다. 당시 이애주 선생이 춘 춤은 한영숙의 살풀이춤이 아닌 그저 허튼춤의 일종인 한풀이춤이었다. 하얀 광목 치마와 저고리에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운구 행렬을 인도하며 춤을 추던 이애주 선생을 코앞에서 본 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의 강렬한 기억은 심장에 확 박혔다. 

이애주 선생에 대한 추모글이 서울문화투데이를 통해 보도되자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전화했다. 1987년 7월 9일 자기도 바로 이애주 한풀이춤을 추는 연세대 정문 현장에 있었노라고. 함께 그날을 회고하였고 이애주 선생의 타계를 슬퍼하는 마음을 공유하는 또다른 계기가 됐다. 

이후 전통무용계가 한국춤문화유산기념사업회를 통해 한성준 탄생 140주년을 조명하면서, 이애주 선생은 제1회 한성준예술상 심사위원장을 맡았었다. 그러나, 이후 한성준예술상과의 빗나간 인연으로 인해 이애주 선생과는 다소 소원했던 것이 사실이다. 고인이 당시 느꼈을 서운함을 비롯한 여러 감정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항상 마음의 짐이 있었다. 

업적으로만 본다면 상을 받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분이다. 다만 여러 사정으로 (한성준)예술상 수상이 유보된 것인데, 고심을 하던 차에 작고하셔서 이제는 풀지 못 채 회한으로 남게 됐다. 한성준 선생의 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통춤 전체로 봐도 이애주 선생은 우리 춤의 고유성을 제대로 살린, 뼈속까지 춤꾼인 명실상부한 최고의 명무로 손색이 없는 분이다. 아울러, 앞서 언급했던 민주화운동을 향한 무용가로서의 헌신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이애주 선생을 기리며 쓴 글도 이러한 마음이 담겨서인지 그냥 바로 써졌다. 여기서 미처 다 밝히지 못하는 속 깊은 사연들은 후일 언젠가는 별도의 책으로 묶어낼 생각이다.  

2년 전, ‘무용분야 무형문화재 보유자인정 불공정심사’ 문제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비대위를 구성하기도 했다.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그간 무형문화재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왔기에,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을 것 같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지금, 문화재청의 제도 및 정책과 무용분야 무형문화재에 제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는 것 같다.

지난 2019년 무용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9명의 예능보유자를 신규로 인정했다. 2015년 당시 박근혜 정부는 당시 집권여당임에도 무용계의 비판여론을 수용하여 지정하지 않고 보류했었다. 그런데 현정부 들어서 무려 9명이나 한꺼번에 지정됐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무형문화재 제도 본래의 취지가 훼손됐고 무용계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악영향이 초래됐다.

그로부터 2년이 경과한 현 시점에서 전통무용계엔 크게 세 가지 흐름이 포착된다. 첫째 창작춤이 퇴조하고 전통춤이 득세하는 현상인데, 원로에서부터 중진에 이르기까지 창작활동보다는 전통춤에 매진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둘째, 40~50대 춤꾼들도 공연할 때 자신의 이름에 ‘~류(流)’자를 붙이는 현상들이 있는데 한마디로 넌센스다. 셋째는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자들이 살고 있는 연고지에 자신이 이수한 종목을 지방무형문화재로 신청하려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다. 이 모두 2019년 사건이 초래한 기현상이 아닌가 싶다. 

문제는 신규 인정된 무형문화재 보유자의 권위가 침탈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견 이상의 춤꾼들 사이에선 ‘그분들보다 내가 더 춤을 잘 춘다’는 의식들이 강한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 같다. 인간문화재(예능보유자)로서의 권위 침탈은 불공정 혹은 불합리한 선정과정에서 기인된 것이다. 가령, 무용분야 문화재위원이 제외된 채, 타분야 위원들에 의해 무용분야 예능보유자가 선정됐다는 것은 무용계 입장에서는 치욕이자 굴욕이 아닐 수 없다. 국회에서 의결정족수 문제까지 불거졌고, 비판적 논조의 언론보도 건수가 약 300여 회를 상회하는 등 무형문화재 역사에서 초유의 사태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정치권력, 행정권력, 일부 (어용)학자들의 합작품이라는 얘기들이 나돌고 있다. 새 정부에서 정책적 손질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2018년 LA무대에 처음 올려진 ‘동방의 불꽃, 한국의 춤 문화유산’ 행사 당시 모습 (사진=해외문화홍보원 제공)
▲2018년 LA무대에 처음 올려진 ‘동방의 불꽃, 한국의 춤 문화유산’ 행사 당시 모습 (사진=해외문화홍보원 제공)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 한국 근대 전통무악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2018년에는 미국 LA에서 한성준의 예맥을 잇는 중견무용가들이 참여한 무대로 주목을 받았는데, 어떻게 기획하게 된 행사인가?

2018년 주LA 한국문화원의 공연작품 공모전 ‘아리 프로젝트(ARI Project)’ 2018년 여섯 번째 무대에 연낙재ㆍ한국춤문화유산기념사업회가 선정돼 진행된 행사이다. ‘동방의 불꽃, 한국의 춤 문화유산’이라는 주제를 담았던 당시 무대는, 한국 전통춤의 대가 한성준 선생의 예맥을 잇는 중견무용가들의 한국춤 명작들을 한 자리에서 선보이는 무대와 더불어, 학술적 해설을 곁들여 차별화를 뒀다. 

다소 촌스러워 보이는 ‘동방의 불꽃’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해외 교류 행사에 참여한 것은 지난 2012년이었다.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아 연낙재와 한중무용교류회 주최로 진행됐던 행사에는 한국과 중국의 무용학자와 무용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주중한국문화원을 비롯, 중앙민족대학, 북경무도대학, 북경사범대 등 중국을 대표하는 베이징 소재 무용 명문대학에서 개최됐으며, 행사기간에는 국제학술심포지엄과 공연, 한국춤 워크샵, 최승희 영상감상회, 조선족무용가와의 간담회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마련됐다. 우리가 주최하는 국제 행사의 가장 큰 특징은 공연에 그치지 않고 학술세미나 등을 통해, 보다 본질적인 우리 춤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행사에 참여했던 이애주, 채상묵 선생은 무용 실연과 더불어 우리춤 메소드에 대한 특강을 진행한 바 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규모에 상관없이 전 세계 다양한 나라에 우리 전통춤을 제대로 알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 

무용학자이자, 2005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단에 서고 있는 교수이기도 하다. 교육자로서 철학은 무엇이고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대처하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학령인구 감소가 빨라짐에 따라, 교수 및 강사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나는 안정적이지 않나. 국가로부터 선택받아 지금의 위치에 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리에 있을수록 공적(公的)인 의무감을 가지고 전문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내가 가진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교육과 연구를 병행해야 하는 자리다. 연구야 자발성으로 진행되는 것이지만, 교육은 변화하는 주변 환경을 인지하고 나 역시 그에 맞춰 새로운 교육방식을 개발해야 한다. 

실기 중심의 예술계는 특히 위계라든가 이런 고질적인 문제들이 많지 않았나. 이제는 스스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다. 급작스러운 변화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함께 파생된다는 것을 알지만, 이는 진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진통들이다. 최근 스콧 갤리웨이의 『거대한 가속』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개인, 사회, 비즈니스 등 사회 모든 영역이 10년씩 앞당겨졌다고 간파한다. 예리한 통찰력이 감탄스럽다. 

지금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공간, ‘연낙재’가 개관한 지 벌써 15년이 됐다. 국내 최초의 무용자료관인 이곳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

연낙재는 지난 2006년 춤지 발행인이자 원로평론가 고(故) 조동화 선생이 평생 모은 자료 기증을 통해 개관됐다. ‘硏駱齋’(연낙재) 명칭은 조동화 선생께서 직접 작명하셨다. 연낙재는 추사의 정신과 맞닿아 있는 금연재의 ‘硏’자와 자료관 뒷산 ‘駱山’(낙산)이라는 지명에서 한 자씩 따와 지은 것이다. 지명에 걸맞게 연낙재는 문사철(文史哲)을 관통하는 인문정신이 살아 숨쉬는 공간을 지향하고 있다. 추사의 고향은 내포의 중심 충청도 예산이다. 한성준 역시 내포사람이다. 나는 내포의 서쪽 끝자락 충남 서산에서 나고 자랐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시절 그린 세한도에는 선비의 절조(節操)와 서릿발 같은 강골정신이 깃들어 있다. 나는 수십 년째 한성준을 천착하면서 예기치 않은 고초도 겪었다. 연낙재 존재의 근원에 얽힌 여러 인연들을 반추하면 필연적 운명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 ⓒ김재성 작가

‘연낙재’는 무용 자료 아카이브 역할과 더불어 전시, 세미나, 강좌, 포럼 등을 개최하는 이른바 무용인들의 사랑방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공간이 어떤 방향으로 더욱 활성화되길 바라는가?

연낙재는 국내 최고의 춤자료 컬렉션을 자랑한다. 근현대 공연 자료를 비롯 민속예능자료, 영상사진자료, 무용가 육필원고와 애장품 등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조선후기의 고문헌 『교방가요』를 비롯 한성준, 최승희, 조택원, 박외선, 김민자 등 근대 무용인물 관련자료 그리고 각종 문서 등 희소적 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2006년 개관이후 지금껏 국내외에서 새로운 춤자료를 발굴, 수집하고 보존하여 춤문화의 저장고 역할을 하고 있다. 연낙재 소장자료는 학술연구를 통한 기록화작업에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국가의 지원없이 개인의 자력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어려움이 적지 않다. 그러나 무용계의 기둥이셨던 조동화, 정병호 두 분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기에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분들의 평생의 혼이 담긴 귀한 자료를 연낙재로 귀속한 것은 그만한 기대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분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여야한다는, 특별한 의무가 내겐 있다.

새롭게 연구해보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우선은 한성준, 조택원, 최승희, 박외선 등 근대 시기를 관통한 근대무용인물론과 한국근대무용사에 대한 저술작업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송방송 선생의 ‘한국음악통사’가 바이블처럼 읽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무용역사를 통찰하는 ‘한국무용통사’를 집필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한예종 전통예술원에 교수로 처음 임용되어 갔을 때 당시 송방송 선생이 당부한 과제이기도 하다. 단순히 무용 내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관점에서 당대 생산 양식이라든가 정치ㆍ사회ㆍ경제까지 포괄적으로 아우르고 싶다. 춤의 역사적 맥락이 그렇게 싹터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근원부터 그 의미를 추적해 가는 “한국무용통사”를 완성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다. 

더불어, 최근 동양 고전 공부에 심취해 있는데 이를 자양분으로 우리 한국의 춤문화가 갖고 있는 존재론적 해명을 인문학적 통찰을 통해 학술적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다. 우선은 더 깊고 넓은 공부가 필요함을 절감한다.

학자로서 자신만의 신념 혹은 철학이 있다면?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는 글자가 있는데, 바로 ‘직(直)’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편에 보면, “人之生也直”(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직(곧음)이다)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곧게 사는 것, 즉 정직하게 사는 것을 강조한다. 역사 속 인물 중에는 ‘직’을 실천함으로써 고난과 역경을 겪은 이들이 적지 않다. 중국의 사마천, 굴원을 비롯 우리나라의 다산 정약용, 매월당 김시습, 추사 김정희 등등... 치욕과 분노를 극복하고 모두 한결같이 기념비적인 저작을 남겼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가려고 한다. 내가 바라보는 관점이 틀릴 수도 있고 또 일부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외부의 요인에 의해 소신과 신념을 바꾸지는 않으려 한다. 직(直), 즉 곧음과 정의로움을 지향할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서울문화투데이와도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계의 ‘전사’(戰士)가 아닌가.(웃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을 수상했을 당시, 여러 상황들로 지쳐있었는데 나를 인정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큰 힘과 위로를 받았다. 문화예술계에, 무용계에는 여전히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무용학자로서 그리고 평론가로서 시대적 소명에 충실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