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벽사 한영숙-정재만 춤의 건재 과시
[성기숙의 문화읽기]벽사 한영숙-정재만 춤의 건재 과시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1.11.28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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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지난 2014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 정재만의 타계는 큰 충격을 안겨줬다. 갑작스런 비보였다. 벽사춤 전수를 위해 지방을 순회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올해 8월엔 벽사(碧史) 한영숙의 수제자 이애주마저 세상을 등졌다. 정재만, 이애주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무 한성준-한영숙류 전통춤의 양대산맥으로 통한다. 때문에 정재만, 이애주의 타계는 한국 전통춤계의 큰 손실로, 지금도 애통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알다사피, 명무 정재만은 이애주와 더불어 한성준-한영숙으로 이어져 온 내포제 전통춤의 가장 뚜렷한 전승계보의 중심 축에 있었다. 1996년 애애주가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고, 그로부터 4년 후 지난 2000년 정재만이 인간문화재(예능보유자) 반열에 올랐다. 이후 정재만은 전국을 누비며 벽사춤을 보급하고 확대하는데 더욱 더 열과 성을 다했다.

정재만의 전통춤 보급활동은 투 트랙(two-track)으로 전개되었다. 워크숍 및 강습회를 통한 직접 전수와 전통춤 공연을 통해 우리 춤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보급하고자 했다. 전수를 통한 양질의 교육과 수준 높은 공연무대를 통해 우리 춤을 보다 널리 보급, 확대하자는 취지였다. 이른바 전통춤 대중화 전략의 일환이었다. 정재만 사후(死後) 그의 제자들은 매년 추모공연을 통해 스승의 가르침과 춤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 특별한 무대가 있었다, 정재만 제자들이 제24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에 초청되어 ‘청아한 기록’(2021년 11월 10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이라는 타이틀로 공연무대를 가졌다. 생전(生前) 정재만 선생이 추구한 춤에 대한 열정과 철학을 가늠해 보는 뜻 깊은 무대였다.

무대는 화려하고 진중했다. 정재만이 배출한 제27호 승무 이수자들이 대거 출연하여 벽사춤의 위용을 과시했다. 독무로 출연한 김충한, 전은경, 정용진의 춤은 단연 눈에 띄었다. 정재만의 애제자 김충한은 한말 구군의 훈령모습을 춤으로 형상화한 한성준의 훈령무를 선보였다. 남성춤 특유의 역동적이면서도 절도있는 몸놀림으로 관객의 시선을 압도했다. 한성준을 시원으로 한영숙-정재만-김충한으로 이어지는 훈령무의 전승계보가 보다 명징하게 가시화되고 있음을 엿본다.

정재만은 스승 한영숙의 태평무를 개작 변용한 이른바 ‘큰 태평무’라는 작품을 남겼다.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한 태평무의 주제를 감안한 듯 화려함과 장엄미가 돋보였다. 군무로 선보인 ‘큰 태평무’에서 이같은 미감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전은경이 ‘큰 태평무’ 초반부에 독무자로 나섰다. 그의 춤은 스승(정재만)의 스승(한영숙)에 더 가깝게 다가선 느낌이다. 내포제 고유의 단아하고 절제된 미감이 특징인 한영숙류 태평무가 연상되었다. 전은경은 시종 정교하고 섬세한 몸놀림으로 정제만의 맏제자임을 입증했다.

정재만의 장남이자 수제자인 정용진은 승무와 광대무를 통해 존재감을 과시했다. 알다시피, 승무는 장삼놀음과 법고놀음으로 구성된 대표적인 민속춤이다. 따라서 승무는 ‘장삼놀음+법고놀음’의 구성에서 고유의 형식미와 미적 완결성이 가늠된다. 정용진이 선보인 승무에서 후반부 법고놀음이 생략된 것은 다소 아쉽다. 다만 허공을 가르는 장삼놀음의 당찬 기운은 섬뜩한 전율을 안겨줬다. 장단을 타고 넘는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다.

광대무에서 정용진은 타고난 재능을 맘껏 선보였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과거 광대무를 춘 정재만에 대해, 혹자는 그 재주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적하기도 했다. 그만큼 신기(神技)로 추었다는 얘기다. 스승의 춤제를 물려받은 정용진의 광대무는 완급이 조율된 춤사위로 안정감과 숙성미가 돋보였다.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생전의 정재만이 여타의 제자들을 물리치고 아들 정용진을 따로 불러 몰래 춤의 비법(秘法)을 전수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부친의 작고이후 일취월장(日就月將)한 정용진의 춤실력에서 벽사춤 ‘비법 전수’라는 남다른 수련 내력이 감지된다.

주지하듯, ‘벽사’(壁史)는 정재만의 스승 한영숙의 아호이다. 한영숙은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의 손녀딸로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40호 학춤 예능보유자로서 명무의 반열에 있었다. 한영숙 또한 스승이자 할아버지 한성준에게 내포제 춤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1930년대 종로 경운동에 터잡고 있던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가르침을 받던 한영숙은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내포 보덕사에 들어가 100일 동안 승무를 집중 연마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보덕사로 향한 지 100일째 되던 날 한성준이 사찰을 찾았고, 혹독한 수련을 견뎌낸 한영숙은 비로소 후계자로 낙점된다. 한영숙 승무에서 내포의 유서 깊은 불교문화의 흔적이 포착되는 결정적 이유라 하겠다.

벽사 한영숙은 1920년 천안 외가에서 태어났다. 천안은 한영숙의 출생지라는 점 이외 뚜렷한 연고는 발견되지 않는다. 한영숙은 5세 무렵 내포 홍성 본가로 돌아와 유년시절을 보낸다. 홍성 갈미보통학교에서 수학하고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울로 상경하여 13세 때 춤에 본격 입문한다. 명무로 거듭나기까지 내포의 사찰은 그의 중요한 춤 수련공간이 되었다. 내포의 기질과 정서를 바탕으로 명무 한영숙이 탄생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다시피, 한성준은 수덕사에서 춤과 장단의 조화와 원리를 터득한다. 이러한 배움의 내력은 그가 명고수·명무로 우뚝 서기까지 큰 자양분이 되었다. 수덕사가 한성준의 수련사찰이었다면 보덕사는 한영숙의 수련사찰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한성준-한영숙의 춤은 내포의 불교문화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 아울러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저서 『택리지』에서 설파한 내포의 인문지리적 특성은 한성준-한영숙류 춤의 고유성으로 자리잡았다. 단아하고 정갈한 이른바 중도(中道)의 미가 바로 그것이다.

한성준-한영숙류 전통춤의 주요 레퍼토리로 짜여진 ‘청아한 기록’은 춤꾼 정재만을 반추한 무대로 손색이 없다. 정재만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명무였다. 그는 1948년 경기도 화성에서 옹기장이 아들로 출생했다. 가계에 흐르는 예혼(藝魂)의 혈통은 일찍이 명무 탄생을 예고했다. 10대에 국립무용단장 송범 문하에 입문했으나 명무 한영숙 눈에 띄어 그의 문하로 적을 옮긴다. 이는 당시 예술계 풍토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간주된다. 이후 정재만은 한성준-한영숙으로 이어지는 내포제 전통춤을 보존 계승하는 데 전념하여 일가를 이룬다.

정재만은 스승 한영숙에 뒤이어 1980년 세종대 무용과 교수로 부임한다. 스승의 아호 ‘벽사(碧史)’라는 이름을 따와 ‘벽사춤아카데미’를 설립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벽사춤아카데미는 새벽연습으로 악명(?) 높았다. 새벽녘에 맑고 청아한 심신으로 춤 수련에 임한다는 원칙은 해를 거듭해가면서 벽사춤 특유의 정신과 예도(藝道)로 정립되었다.

전통춤 무대 ‘청아한 기록’은 한성준-한영숙-정재만으로 이어져 온 이른바 벽사춤의 정신과 예혼을 반추한 무대였다. 근래 들어 전통춤 전승환경의 급속한 변화와 전승 지평의 분화에 따른 복잡 미묘한 흐름들이 포착된다. 이러한 흐름에서 진정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성장한 정통파 춤꾼들이 꾸민 벽사춤 무대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탄탄한 기본기와 속 깊은 멋으로 벽사 한영숙-정재만 춤이 ‘오늘·여기’ 건재함을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