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연말 오페라 극장 달군 국립오페라단 <라트라비아타>
[이채훈의 클래식비평]연말 오페라 극장 달군 국립오페라단 <라트라비아타>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1.12.0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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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무난했지만 어수선한 연출로 아쉬움 남겨

국립오페라단의 <라트라비아타>가 연말 오페라 극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2일(수)부터 5일(일)까지, 주말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됐고 첫 공연만 빈자리가 조금 남아 있었다. 코로나로 위축된 시절이니 만큼 좋은 공연에 목마른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오페라로 꼽히는 <라트라비아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국립오페라단 ‘라트라비아타’ 프레스 리허설 장면
▲국립오페라단 ‘라트라비아타’ 프레스 리허설 장면

공연 첫날,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는 만석이었다.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수준급이었다. 전주곡은 마음에 와 닿았다. 여린 현이 3막 고독한 비올레타의 주제를 연주하고, 2막 ‘알프레도, 저를 사랑해 주세요’의 애절한 주제가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지휘자 세바스티안 랑 레싱은 다부진 카리스마로 탄탄하게 오페라를 이끌었다. 현악 파트는 안정돼 있었고, 금관과 목관은 생동감이 있었고, 멀리서 들리듯 뮤트 처리된 오케스트라 효과는 절묘했다.  

첫 공연이라 그런지 무대가 다소 어수선한 게 사실이었다. 파티 장면은 인원이 너무 많아서 부담스러웠고, 코러스의 왁자지껄한 소리 때문에 오케스트라가 잘 들리지 않았다. 연출이 세련되지 못해서 드라마의 몰입을 방해한 측면도 있어 보였다. 1막, 비올레타가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잔을 깨고 테이블보를 끌어내리는 모습은 볼썽사나웠다. 2막, 비올레타가 제르몽의 멱살을 잡은 동작은 우악스러워서 비올레타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다. 알프레도가 아버지에게 버르장머리 없는 아들처럼 행동하도록 한 연출도 거슬렸다. 제르몽은 비올레타에게 잔인한 요구를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는데, 이 점은 전혀 표현되지 않았다. 2막 파티 장면에서 발레복을 입은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면은 19세기 귀족의 퇴폐성을 비판하려는 의도인지 모르겠으나 뜬금없어 보였다. 비올레타가 1막부터 피묻은 손수건을 들고 있는 것은 과장이었다. 3막에서만 들고 있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연출이 섬세하지 못한 탓인지 심지어 ‘알프레도, 저를 사랑해 주세요’(amami Alfredo) 대목도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다. 어느 프로덕션을 보든 이 대목에서 어김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날 공연만큼은 눈물이 나지 않았음을 밝혀야겠다. 3막, 비올레타가 창문을 열 때 빛이 쏟아져 들어오도록 연출한 장면은 괜찮았다. 의상, 분장, 조명, 세트는 무난했다. 비올레타의 의상과 분장은 3막은 적절했지만, 1, 2막에서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자존심 강한 비올레타의 이미지를 좀 더 잘 살릴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국립오페라단 ‘라트라비아타’ 프레스 리허설 장면
▲국립오페라단 ‘라트라비아타’ 프레스 리허설 장면

첫 무대라서 그랬겠지만, 1막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느낌이다. 비올레타의 김성은은 고음이 약했고, 자연스레 탁 트인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알프레도의 김우경은 미성이었지만, 관객들의 집중을 이끌어 내기엔 흡인력이 다소 부족했다. 그러나 1막, 알프레도가 무대 뒤에서 ‘신비롭고 고귀하네’(misterioso, altero)를 노래하는 대목만큼은 무척 아름다웠다. 음악은 2막, 3막으로 가면서 점차 안정을 찾았다. 2막 알프레도의 첫 아리아가 끝나자 객석에서 비로소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김우경의 미성이 단연 돋보인 대목이었다. 제르몽 역의 양준모가 등장하면서 음악은 제 궤도에 올라 자연스레 흘러갔다. 그는 탄탄한 기량과 흡인력 있는 목소리로 비올레타와의 앙상블을 훌륭히 이끌었다. 제르몽의 아리아 ‘프로벤차의 바다와 대지’는 이 날 공연 중 가장 멋진 대목이었다. 그가 등장한 뒤 알프레도와 비올레타도 날개를 단 듯 제 실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었다. 비올레타의 3막 아리아 ‘안녕 지난날이여’는 아주 섬세하여 청중들의 마음을 적셨다. 열정을 다해 노래하고 연기한 성악가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라트라비아타>의 감동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이런저런 아쉬움도 없지 않은 공연이었다. K-팝과 K-컬처가 세계인의 인정을 받는 지금, K-오페라도 이젠 세계 수준을 바라볼 때가 됐다. 다양한 동영상을 접하면서 오페라 팬들의 기대 수준이 과거보다 훨씬 높아졌다. 국립오페라단의 분발과 도약을 보고 싶다.   

<라트라비아타>는 ‘길을 잘못 든 여자’란 뜻으로, 19세기 중반 파리 사교계를 주름잡은 마리 뒤플레시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춘희’(椿姬)라고 옮겼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미자의 히트곡 ‘동백아가씨’로 알려져 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마리 뒤플레시는 뛰어난 미모와 지성으로 파리 사교계의 인기 있는 코르티잔이 된다. 원작자 뒤마 피스는 그녀를 실제로 사랑했고, 그녀의 이름을 마르그리트 고티에로 바꿔서 소설을 썼다. 이 여주인공은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비올레타로 다시 한 번 변신한다. 

파리의 한 파티장, 알프레도가 사랑을 고백하자 비올레타는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결국 그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된다. 그녀가 불행의 바닥에서 행복의 정점으로 뛰어오른 바로 그 때,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찾아와 떠나 줄 것을 요구한다. 너 때문에 집안의 평판이 나빠져서 딸의 혼사가 막혔다, 너희들의 사랑은 곧 시들 것이다…. 사형선고보다 끔찍한 요구지만, 비올레타는 자기를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그녀가 변심한 것으로 오해한 알프레도는 파티장에서 그녀를 잔인하게 모욕한다. 홀로 버려진 비올레타는 결핵이 악화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알프레도가 그녀를 찾아오고, 비올레타는 그의 품에 안겨서 숨을 거둔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한다, 사랑의 방해꾼이 등장한다, 여자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19세기 낭만 오페라의 판에 박힌 공식을 벗어나지 않지만, 당시 프랑스 상류사회의 풍속도를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요소가 짙어서 무척 흥미로운 작품이다. 21세기의 시각에서 보면 여자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게 불합리해 보이지만,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최고의 멜로드라마라 할 수 있다. ‘축배의 노래’, ‘아, 이상해라’, ‘언제나 자유롭게’, ‘프로벤차의 바다와 대지’, ‘파리를 떠나서’, ‘안녕 지난날이여’ 등 아름다운 베르디의 음악이 심금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