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비평]푸치니 <라보엠>, 추운 시대에 따뜻한 위로를 건네다
[이채훈의 클래식비평]푸치니 <라보엠>, 추운 시대에 따뜻한 위로를 건네다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1.12.1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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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예술가들의 꿈과 사랑, 21세기 한국에서도 현실감
권은주, 박지민, 김기훈 등 열창, 관객에게 힐링과 기쁨 선물

크리스마스와 연말에는 역시 푸치니의 <라보엠>이 제격이다. 12월 10일 예술의전당, 에이원아르테가 마련한 오페라 콘체르탄테 <라보엠>은 이 추운 시절에 관객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선사했다. 셋방살이 신세지만 예술가의 꿈을 잃지 않는 젊은이들(시인 로돌포, 화가 마르첼로, 음악가 쇼나르, 철학도 콜리네), 뜨개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이웃 처녀 미미, 가난하지만 가수를 꿈꾸는 무제타…. 크리스마스 이브에 피어난 로돌포와 미미의 사랑은 겨우내 우여곡절을 겪은 뒤 미미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의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페라 콘체르탄테 시리즈1, 쟈코모 푸치니의 ‘라 보엠’ 커튼콜
▲오페라 콘체르탄테 시리즈1, 쟈코모 푸치니의 ‘라 보엠’ 커튼콜

이 날 공연은 로돌포의 가사처럼 ‘관객의 찬 손을 따뜻하게 녹여준’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1840년대 파리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1851년 앙리 뮈르제의 소설 <라보엠의 삶, 그 장면들>(Scènes de la vie de bohème)로 형상화됐다. 라보엠’은 ‘보헤미안’과 같은 말로, 현실 세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젊은 예술가들을 뜻했다. 1896년 푸치니가 오페라를 완성했을 때도 가난한 젊은이들의 삶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2021년 겨울, 한국의 젊은이들도 그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 힘겹게,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며 사랑과 우정을 갈구하고 있다. 오페라 <라보엠>은 시간과 공간을 너머 요즘 한국에서 더욱 짙은 현실감으로 다가온다. 

오페라 콘체르탄테는 무대 장치를 생략하고 음악 위주로 공연하는 형식이다. 오케스트라 앞에 간단한 소품들을 놓고 출연자들이 약식으로 연기하며 노래했는데, 충분히 즐길 만 했다. 나는 1층 맨 앞자리에 앉아서 출연자들의 표정과 숨결을 가까이 느끼는 호사를 누렸다. 1막 가난한 셋방, 네 명의 남성 성악가가 젊은 예술가들의 사랑스런 이미지를 잘 표현했고, 집주인 베누아를 골려주는 유머러스한 대목을 활기찬 앙상블로 생동감 있게 들려주었다. 로돌포의 아리아 ‘그대의 찬 손’과 미미의 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 이어지는 두 사람의 ‘사랑의 이중창’은 커다란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2막 크리스마스 이브의 거리, 어른 합창(스칼라오페라합창단)은 코러스석에서 꽉찬 소리를 들려주었고, 마스크를 쓴 어린이합창(월드비전합창단)은 무대 앞으로 등장, 열심히 노래하여 귀엽고 사랑스런 모습을 과시했다. 무제타가 마르첼로를 다시 만난 뒤 늙은 알친도르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장면은 큰 웃음을 자아냈다. 3막 이듬해 2월, 로돌포와 미미, 마르첼로와 무제타가 헤어지는 사중창이 압권이었다. 하나의 음악 흐름 속에 네 명의 서로 다른 대사가 펼쳐지는 것은 연극에서는 볼 수 없는, 오페라만의 매력을 한껏 맛보게 해 주었다. 4막 따뜻한 4월, 미미는 결핵이 악화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다. 병상의 그녀가 로돌포를 처음 만난 순간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1막 ‘사랑의 이중창’과 ‘내 이름은 미미’, ‘그대의 찬손’ 모티브가 다시 등장하여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소프라노 권은주(미미), 테너 박지민(로돌포), 바리톤 김기훈(마르첼로), 바리톤 오유석(쇼나르), 베이스 최웅조(콜리네, Colline는 프랑스말로는 ‘콜린느’지만 오페라의 대본이 이탈리아말이기 때문에 ‘콜리네’로 발음)는 유럽에서 커리어를 쌓은 베테랑답게 훌륭한 역량을 선보였다. 박지민의 열정적인 음색과 김기훈의 부드러운 음색은 좋은 대조를 들려주었다. 베이스 최웅조의 꽉찬 저음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오유석은 네 젊은이들 중 그나마 먹을 것을 구해 오는 음악가 쇼나르 역을 활기 있고 유쾌하게 잘 소화해 냈다. 다만, 4명의 남자 성악가들은 내가 앉은 1층 1열에서는 잘 들렸지만, 강약의 대비가 좀 컸기 때문에 여린 소리는 먼 좌석에서 잘 안 들렸을 것 같다. 

조역이지만 베누아와 알친도르의 1인 2역을 맡은 박상욱도 유쾌한 표정과 안정된 호흡으로 관객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유성녀(콜로라투라 소프라노)는 2막에 등장, 소신 있고 자유분방한 무제타의 이미지를 잘 연기했다. 유명한 ‘무제타의 왈츠’를 훌륭히 노래했는데, 다만 7도 도약하는 대목에서 일관된 성량과 톤을 유지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코리아쿱 오케스트라는 김덕기의 안정된 지휘로 편안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2막에서는 종소리와 금관악기가 맹활약하여 화려한 음색을 선보였고, 플루트와 클라리넷 솔로도 매번 성악과 잘 어우러졌다. 4막, 미미의 꺼져 가는 미미의 숨결을 묘사하는 듯 악장과 바이올린 수석이 가냘프게 연주한 대목은 참 아름다웠다. 미미의 죽음을 암시하는 관악기의 화음은 가슴을 두드렸다. 오케스트라가 좀 더 기민하고 총기 있게 연주하면 좋겠다 싶은 대목도 몇 군데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청중들을 몰입시켜 힐링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굳이 아쉬움이 있다면 1막 파릇파릇한 서주, 여덟째 마디에 나오는 꾸밈음을 다소 소홀히 취급한 게 아닌가 싶었다. 발랄하고 싱그러운 젊음을 표현한 대목인데, 전체 선율보다 이 꾸밈음 하나에 포인트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3막과 4막에도 변형되어 등장하는 이 모티브에서 번번이 꾸밈음의 음가를 충분히 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즐거움이 반감된 게 아닌지, 허전함이 남았다.      

연출은 센스 있고 간결했다. 2막 무제타가 자기 인생을 노래하며 지휘자 김덕기의 손을 잡게 한 것은 관객을 놀라게 했지만 곧 공감할 수 있는 연출이었다. 4막 미미가 숨을 거둘 때 하얀 스파트 조명으로 그녀의 얼굴을 비춰 준 것은 감동이었다. 막과 막 사이사이에 예술감독 허철이 간결하고 재치 있는 해설로 이해에 도움을 주었다. 

추운 연말이다. 가사의 한 대목처럼 “이 겨울에 홀로되는 건 죽음”이다. 미미의 마지막 절규처럼 “로돌프의 사랑은 그녀의 모든 것”이다. 우리 시대도 겨울의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는 듯 하다. 푸치니의 <라보엠>으로 이 추운 시대에 사랑의 온기와 음악의 위안을 전해 준 출연자들과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