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의 인문학 파먹기] 레퀴엠(requiem)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의 인문학 파먹기] 레퀴엠(requiem)
  • 윤이현
  • 승인 2021.12.20 1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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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위령 미사곡)’. 전기 글 모차르트의 맨 마지막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그가 쇠약해질 무렵, 의문의 남성으로부터 레퀴엠 작곡 의뢰를 받았으며, 그 곡을 만들면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짧은 서른다섯의 생애가 끝났다. 부인 콘스탄체마저 참석하지 않은 쓸쓸한 장례식, 부랑자나 돌보는 이가 없는 이들이 묻히는 막스 공동묘지에 잠든 비운의 천재.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묘지로 가는 도중에 행렬에서 벗어나 끝내 모차르트의 묘가 어디인지 아직도 알 수 없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작품 영화 '레퀴엠' 포스터 (출처:https://blog.naver.com/)
대런 아로노프스키 작품 영화 '레퀴엠' 포스터

그리고 여기 또 다른 레퀴엠이 있다. 현존하는 작품 중 가장 우울하다는 영화 레퀴엠’. 중년의 미망인 사라는 매일 1인 소파에 앉아 다이어트를 주제로 한 태피 티본스 쇼를 본다. 진행자의 동기부여와 명언을 듣는 일만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다. 아들 해리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한심하게 생각한다. 어김없이 텔레비전을 고물상에 팔아버리려 내놓지만, 사라는 몰래 그것을 찾아와 또다시 스위치를 켠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 티비 쇼에 출연할 기회가 생겼다는 의문의 연락이 온다. 사라는 빨간 드레스를 입었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몹시 들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의 몸매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에 빠진다. 결국, 약물을 처방받아 극한의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한편 해리는 여자친구 마리온과 영원한 미래를 꿈꾼다. 그는 친구 타이온과 마약 거래로 돈을 벌어 패션 디자이너인 그녀의 꿈을 이뤄주고 싶어 한다. 그렇게 셋은 위험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어느새 세 사람은 마약에 중독된다. 처음과 달리 점차 사업은 어려워지게 되는데, 돈이 떨어지자 한탕을 노리기 위해 해리와 타이온이 물건을 구하러 가기로 한다. 그사이 마약에 심각하게 중독된 마리온은 그들을 기다리다가 약을 구하기 위해 마약 거래상에게 몸을 팔고 만다. 결국 돈도 물건도 건지지 못한 해리의 팔은 주사 자국으로 썩어들어가고, 타이온은 감옥에 끌려간다. 사라는 다이어트약에 심각하게 중독되어 제정신이 아닌 채로 거리를 방황하다 정신 병원에 감금된다. 팔이 잘린 해리, 전기 충격 치료로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사라, 엄마와의 과거를 회상하며 감옥에서 잠이 드는 타이온 그리고 몸을 판 대가로 얻어낸 마약을 품에 안고 패션 잡지들 사이에서 잠이든 마리온.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레퀴엠' 속 장면 마약에 취해 누워있는 해리와 마리온 (출처:https://blog.naver.com/)
영화 '레퀴엠' 속 장면 마약에 취해 누워있는 해리와 마리온

곱씹어보면 어딘가에 중독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던 것 같다. 아주 어릴 적엔 하루 일곱 시간씩 게임에 몰두했다. 그래야 텅 빈 집을 점령하고 있던 시간의 싸움에서 견뎌 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인형 놀이가 좋았다. 가족들의 이름을 딴 인형들을 세워놓고 그들과 이야기 하는 것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땐 선생님(교사)이 되고 싶었으므로 매일 인형들에게 직접 만든 프린트물을 나눠주며 역할극을 하기도 했었다.

중학생 땐 친구와 매일 전화를 했다. 화구(畫具) 가방을 들고 홍대 밤거리를 걷는 시간, 그 순간을 버틸 수 있게 한 건 친구들과의 의미 없는 농담, 손에 들린 수채화 한 점이 전부였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낙으로, 성인이 되어서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시콜콜한 얘기 그러다 꿈길을 헤쳐 들어가곤 했다. 무수한 시간과의 싸움으로부터 살아내고 이겨낼 수 있었다. 모차르트에게 음악만큼은 아니더라도, 비록 일관되지는 않았지만 내게도 꿈과 중독될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허공으로 흩어져버리는 담배 연기처럼, 사랑도 꿈도 목적도 사라지고 말았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연재하는 일, 카페에 나가 잠시 엄마 일을 도와주는 것 말고는 멱살을 잡고 조여오는 세월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다. 그럴 때면 고요한 거실에 나와 노래를 불러보기도 하고, 일기를 쓰기도 하며 때로는 친구에게서 이따금 오는 메시지에 답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채워지지 않는 슬픔과 공허함은 아마도 지금 내게 중독된 무언가가 없기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죽을 고비, 이따금 찾아오는 사랑의 아픔과 경제적인 압박 그리고 음악가로서의 비극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으로 풀어냈던 모차르트처럼. 완결된 맥락의 삶은 아닐지라도, 내 일상에도 빠져들 만한 작은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아쉬운 탄식을 내뱉는다.

그래서 요즘은 집 구석구석에 놓여있는 옛 사진들을 찾아보고 있다. 언니들의 어린 시절, 야생마 같던 아빠의 젊음, 순수하게 빛났던 엄마의 생기를 꺼내어 본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포대기에 싸인 나를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각자의 삶과 시간을 이끌어 나갔는지, 그들의 시간은 무엇으로 중독된 채 여기까지 왔을지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월을 느끼기도 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위로를 받기도 한다.

우리는 내쉬는 한숨 한 번, 우는소리 한 가닥, 웃음 한 박자를 모아 각자의 레퀴엠을 연주하고 있다. 지금 입술로 뱉어져 나온 탄식도 장황한 대서사시의 한순간이라고 생각해버리면 조금은 마음이 가벼울 것 같다. 길고 긴 인생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순간, 이별의 아픔, 꿈이 없어진 허망함 따위는 곡의 짧은 한마디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서랍에 정신과에서 받아온 약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젠 더는 먹지 않기로 했다. 오늘만큼은 모차르트를 펼쳐놓고 가족들의 사진 속에서 잠이 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