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혜의 조명 이야기] 겨울밤 빛으로 행복찾기
[백지혜의 조명 이야기] 겨울밤 빛으로 행복찾기
  • 백지혜 디자인 스튜디오라인 대표, 서울시좋은빛위원회 위원
  • 승인 2021.12.2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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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혜 건축조명디자이너/디자인스튜디오라인 대표

어릴 적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벅찬 마음으로 명동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곤 했다. 부모님을 졸라 겨우 얻어낸 돈을 손에 쥐고 친구들과 명동에 가서 백화점 순례를 하는 일은 지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

백화점 문여는 시간에 맞추어 일찍 집을 나서면서 늘 어둡기 전에 들어오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백화점 몇 개를 돌면서 친구에게 보낼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고 새 학년에 쓸 공책 몇 권을 사는 게 전부인데 그것을 고르느라 하루가 꼬박 걸렸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부모님의 꾸지람이 걱정되지만 우리는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장식 구경을 놓칠 수는 없었다. 주인공은 늘 산타와 루돌프였고 루돌프의 코는 빨강색 조명이 켜지고 마차는 화려한 조명장식으로 휘감아져 우리를 들뜨게 했고 산타의 얼굴은 그 빛으로 붉어졌다 하얘졌다를 반복하며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기억이 난다.

거리에 캐롤이 울려 퍼지고, 눈까지 흩뿌리면 집에 가는 버스가 여러 대 지나가도 고개를 치켜 들고 보느라 깜깜해 지는 것도, 매서운 바람에 손과 발이 어는 것도 몰랐었다.

늦깍이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갔을 때, 짧은 영어보다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든 것은 고층 건물로 둘러싸여 한줄기 햇빛이 그리운 맨해튼 거리와 늘 바빠 보였던 사람들이었다. 아침엔 출근하느라 인사조차 나누기 조심스러운 이웃들의 삭막함이, 낮에는 표정 없이 가게를 지키는 이민자들의 무기력함이 제2의 인생을 준비하겠다고 야심차게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나를 우울과 무기력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우연히 유명 백화점 앞에 사람들이 줄 지어 서있는 것을 보았다. 가족, 친구 등 다채로운 사람들의 행렬은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종잡을 길 없었으나 줄 선 이들의 얼굴이 매우 즐거워 보여 뭔가 좋은 일인 것 같아 - 크리스마스 시즌에 백화점은 언제나 마음의 고향이다. - 나도 줄을 섰다. 바로 앞에 선 관광객인 듯한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본인들도 잘 모른단다.

세상을 구원하는 이가 태어난 크리스마스 시기, 맨해튼의 칼바람이 더 서럽다고 느낄 즈음 앞에 선 사람들의 웃음과 함성이 들려오고 조금씩 발을 옮기며 내 눈에도 환한 빛이 들어왔다. 백화점 쇼윈도에 크리스마스 동화를 시리즈로 연출하고 알록달록한 색조명으로 장식하였는데 그 디테일과 색감 그리고 내용이 마치 예쁘고 보물 같은 동화책을 통째로 선물 받은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도 따뜻해지고 눈물 나는 미소를 짓게 했다. 그 해 겨울, 하루도 쉬지 않고 거리를 누비며 도시의 크리스마스를 즐겼다. 거리는 여전히 해가 들지 않고 건물들 사이로 칼바람이 불었지만 모퉁이를 돌면 기적처럼 크리스마스 장식조명들이 반짝이고 그 주위에는 웃음 가득한 사람들이 서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여전히 연말이 되면 백화점 주변이 궁금하다. 한 때 서울시에서 에너지절감 차원에서 백화점의 조명을 문제 삼았고 발빠르게 우중충한 백화점 파사드가 연출되었었다. 어떤 백화점은 예술을 입혀 해마다 “저게 뭐지?” 시리즈로 장식을 하곤 했다. 머리가 복잡하고 혼자라고 느껴질 때 백화점의 소란이 가끔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이미 2년째 우리는 나라에서 발표하는 행동강령 - 몇시까지 몇 명과 무엇을 하는 것까지 허용되는지 -에 따라 주도면밀한 삶을 살고 있다. 마스크 속에서도 웃을 수 있고 둘이서도 행복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일상이 아닌 일상 속에서 나의 행복은 이미 오랫동안 너무나 제한 적이다.

문체부, 관광공사, 문화재청 문화, 예술 키워드를 빛과 영상 컨텐츠에 담아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하고 있다. 예산을 들여 빛의 명소화,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을 열고 있지만 부풀려진 잔치라는 생각이 든다. 위로는 감동의 크기보다는 깊이에 있으며 이는 양보다는 질로부터 온다. 이런저런 빛 관련 행사들을 계획하기도 하고 자문하기도 하고 또 심의하기도 하면서 도시도 다르고 주제도 다른데 같은 컨텐츠가 계획되어 있거나, 장소의 맥락에 전혀 들어맞지 않고 공감조차 어려운 컨텐츠가 상연되기도 하는 사례를 보며 예술가의 주관성과 공공미술의 객관성은 어디에서 합의를 봐야 하는 것인지 안타깝다.

어제는 운전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어느 백화점의 미디어 파사드를 보며 또 즐거워졌다.

흔하고 뻔한 크리스마스의 모티브들이 아주 정교하게 표현되고 아름답게 색 입혀진 영상컨텐츠가 복잡한 사거리에서 눈길을 끌고 있었다. 여러 페이지의 홍보계획이나 매체와의 기사화 약속도 없었을 텐데 많은 사람들이 주변을 가득 매우고 즐겁게 구경을 하거나 영상을 담고 있었다. 막히는 시간이라 재수 좋게 차 안에 앉아 영상을 즐길 수 있었는데 영상미, 완성도, 공공성 그리고 재미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수 없었다. 돈 한푼 안 내고 좋은 미디어 영상 전시를 구경한 느낌이랄까..

지자체 미디어 사업의 목적은 한결같다. 명소화, 주변 상권 활성화를 통한 경제적 이득. 이를 위해 사람들이 와야하고 감동해야 한다. 홍보계획이나 결과물에 대한 자화자찬이 아니라 컨텐츠의 질, 실행의 완성도 그리고 사람들의 감동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한다.

미디어 아트, 컨텐츠를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자 사업을 하는 모든 기관들 - 문체부, 문화재청, 기타 지자체 등등 -은 꼭 알아보기 바란다. 무엇의 차이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