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정영두의 춤-‘구두점의 나라에서’
[이근수의 무용평론]정영두의 춤-‘구두점의 나라에서’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1.1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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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2021년을 마무리하면서 국립현대무용단(남정호)의 공연활동이 전례없이 활발했다.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10,22~24),  ‘우리가족출입금지’(11.19~21), ‘겨울나그네’(12,3~5), ‘구두점의 나라에서’(12,10~12) 등 4개 작품이 두 달 남짓한 기간 내에 관객들을 만났다.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가 1년 만에 재공연을 가진 것을 제외하곤 모두가 초연작이다. ‘우리가족출입금지’와 ‘겨울나그네’는 3인의 외부 안무가가 초청된 트뤼플 빌 성격의 공연이고 ‘구두점의 나라에서‘는 현대무용가 정영두가 발레테크닉을 기본으로 안무한 작품이었다. 정영두는 LG아트센터 전속단체인 두댄스시어터 (DOO DANCE THEATER)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면서 푸가(2015), 제7의 인간(2010, 2021), 심포니 인 C(2018) 등으로 이미 최고의 예술성을 인정받은 안무가다.

<구두점의 나라에서(IN THE LAND OF PUNCTUATION)>의 원작은 작고한 독일시인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타인(1871-1914)의 동시(童詩)에 인도출신 영국 그래픽 디자이너 라트나 라마나탄의 그림이 덧붙여져 완성된 시화집이다. 인도에서 처음 출간된 후 2015년 한국에서 발간된 이 책은 재생용지에 실크스크린으로 인쇄되고 손으로 제본한 특이한 책이다. 책 자체가 지구환경보호란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1000부 한정판으로 제작되어 책마다 고유번호가 찍혀 있다. 정록이가 조 안무가 겸 무용수로 출연하고 무대미술과 의상에 정민선, 음악에 신동일 작곡가와 듀얼 피아니스트로 신은경, 안지아가 참여했다. 정민선은 예일 대학 드라마스쿨을 졸업하고 국립무용단의 ‘다섯 오(FIVE)’공연에서 세련된 색채감각을 보여준 무대미술전문가다.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고 스토리텔링을 디자인 바탕에 두고 있다. 신동일은 서울음대와 뉴욕대학원(NYU)을 졸업하고 아동청소년부문 음악과 환경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작곡가다. 특이한 소재, 두 전문 스태프와의 만남은 <구두점의 나라에서>를 춤으로 표현하기 위한 최적의 조합으로 보인다.  

무대 중앙 가장 깊은 곳에 복도로 연결된 출입구가 설치되고 좌우에 그랜드 피아노 두 대가 놓여있다. 출입구는 스크린 겸용이다. 얼굴만 내놓은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색 타이츠를 입은 무용수들이 구두점나라의 시민들이다. 검정색을 기본색으로 빨간 색깔의 모자와 목 보호대, 클래식 튀튀가 타이츠에 장착되어 의상의 변화를 준다. 이 나라엔 마침표(.), 쉼표(,), 물음표(?), 느낌표(!), 다양한 형태의 괄호표시(《 》【 】…)에 화살표(→), 플러스와 마이너스(+, −), 따옴표(“”) 까지 다양한 형태의 구두점들이 살고 있다. 10명의 출연자는 각각 다른 부호를 의인화한다. 구두점 하나가 순수하게 하나의 의미만을 표시하는 나라에서 복합부호는 기피대상이다. 마침표와 쉼표가 아래위로 결합한 세미콜론(;)은 시민들로부터 기생충으로 인식된다. 시민들은 기생충을 퇴치하기 위한 반 세미콜론부대를 창설하고 양 진영 간의 대결이 시작된다. 10여개 단락으로 구분된 70분 공연은 춤이 바뀔 때마다 무대와 조명을 변화시키고 17개의 피아노 음악이 춤을 후원한다. 원작의 스토리는 <평온-위험-대결-살육-진압-평온>의 순서로 전개되지만 정영두는 이러한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마이너스(−) 기호들이 세미콜론을 살육하고 대시(-)기호는 쉼표 들을 말살시키는 등 자극적인 내용들이 삭제되고 구두점들이 혼자서 혹은 섞여서 추는 춤들로 무대는 다양하게 전개된다. 때로는 보랏빛 조명이 비추는 텅 빈 무대에 음악만이 울려 퍼지며 피아노 콘서트 장을 방불케도 한다.  

조명이 바뀌고 소도구들이 등장하지만 특별한 사건과 클라이맥스를 수반하지 않으면서 계속되는 무대는 때로 단조롭게 느껴진다. 어른이 보는 동화라고 할 수 있을까. 어린이 청소년 무용이라고 소개되었지만 정작 객석에 어린이 관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호두까기인형 같은 스펙터클을 기대하고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에게는 지루하고 난해한 작품으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원작을 알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작품의 시놉시스와 음악구성, 출연자(구두점 부호)별 의상의 차이를 구별시켜주고 이어지는 장면에 대한 설명이 주어졌다면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원작이 내포하고 있는 콘텐츠는 호두까기인형에 필적할만한 재미있는 소재다. 구두점의 나라에서 공적(公敵)으로 취급받고 있는 세미콜론이 환경오염이나 일반인들로부터 지탄받는 반사회적 행위들을 은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호두까기인형’처럼 ‘구두점의 나라에서’가 어린이와 어른들이 연말이면 찾게 되는 국립현대무용단의 레퍼토리작품으로 거듭 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