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여름, 심비디움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여름, 심비디움
  • 윤이현
  • 승인 2022.01.23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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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스무 살 때부터 종로의 한 작은 카페 심비디움에서 일하고 있다. 작년에 일주일간 가출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쉬어본 적이 없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5일을 하루에 딱 세 시간,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에 투입된다. 어리바리 20세 아르바이트생 영채에서 제법 포스가 있는 스물셋 이현이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커피를 내렸는지, 그것들을 모았더라면 동네 하천 쯤은 이루지 않았을까 싶다.

아직도 첫 출근날이 생생하다. 사장님은 30대 젊은 여성이었다. 주문을 받고 음료를 제조하는 것부터 서빙까지가 아르바이트생 한 사람의 몫이었다. 이제껏 해본 아르바이트 중, 가장 극악의 난이도였다. 보통 사장님은 샷을 추출하거나 어려운 메뉴를 담당하시는 편이었고, 나는 주문한 손님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가 커피를 전달해주고는 다시 음료를 제조하기 위해 주방으로 돌아와야 하는 구조였다. 서비스 정신이 제대로 갖춰지기 전이라, 손님을 대하는 일부터도 너무 힘이 들었다. 게다가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현장에 바로 투입됐을 때의 공포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게가 한산해졌을 때 즈음, 옆 가게 미용실 사장님이 놀러 오셨다. 한 번 내 얼굴을 스캔하고는 둘의 은밀하고도 짧은 대화가 시작됐다. “쟤 어때?” 그때 사장님은 곧잘 알아듣긴 하는데, 잘 모르겠네.”라고 말했다. 바로 뒤에 내가 있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딱 목줄 묶여 시장에 나온 강아지 신세였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칫하면 홀로 남겨진 서울에서 일자리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피향처럼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부산에서 갓 올라와 뭐든 해보겠다며 덤볐지만, 이대로 하다간 한 달은커녕 한 주의 수당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이렇게 허둥지둥했다간 해고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살아남아야 했다. 그때부터 나는 보이는 족족 모든 곳을 정리하고 닦기 시작했다. 너저분한 통들을 배열에 맞춰 정리해놓고, 허구한 날 매장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불나기만을 기다리는 소화기를 꺼내 먼지를 닦고 내부의 분말이 굳지 않게 주기적으로 흔들어 주었다. 그날 새로 배운 것은 죄다 일지에 정리한 후 바로바로 숙지했으며, 명절이나 특별한 날엔 잊지 않고 사장님 선물을 챙겨드렸다. 친한 친구가 놀러 오면 사장님이 계시지 않더라도 꼭 내 카드로 결제한 후 음료를 마시게 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노력 끝에 결국 일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 후로 사장님과 나는 좀 각별한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다. 스무 살의 내가 입시나 연애 문제로 고민할 때 사장님은 인생은 참 길다며 매번 다독여주셨고, 반대로 사장님이 결혼 문제와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의기소침해 있을 때 나는 그저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이에 두고 묵묵히 경청하며 함께해 드렸다. 서로가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지만, 그렇게 마주하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일일이 먼지를 찾아내서 닦아낼 정도로 열심히 해야 했나 싶긴 하지만, 아마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땐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이었고, 내 행복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흘러 사장님은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분과 결혼을 했다. 서울에 인접한 소도시에 그토록 꿈꾸던 카페를 오픈하셨고,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셨다. 사실 얼마 전, 안부도 전하고 인사드릴 겸 문자를 넣었었다. 사장님은 오랜만이라며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꺼내어 보내주시기도 했다. 바로 그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구름처럼 떠올랐다. 무더운 여름, 카페에서 내내 흘러나오던 음악, 각자의 고민을 품고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진득한 커피 향이.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날의 카페 심비디움의 외관, 사장님과 함께 바쁘게 커피를 만들던 순간도, 쓸쓸하게 집으로 들어가면서 마셨던 시원한 아메리카노도. 그날 퇴근하면서 바라봤던 푸른 빛의 하늘도 모든 게 완벽한 영화 같았는데.

엄마가 카페를 인수하고 난 뒤에도 나는 계속 일하고 있다. 동시에 여러 업종의 매장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나는 어디에서든 곧잘 일한다는 평가를 받곤 하는데, 그것은 심비디움에서 보냈던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드러나지 않더라도 지키려 했던 무언의 약속들, 성실함 끝내 얻은 숭고한 노동의 대가 등의 기억은 늘 내 몸속 세포 여기저기에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나를 붙잡아줬던 건 그 시절 카페에서 자주 나오던 음악들이었으며, 오늘을 살게 한 건 그때의 기억 덕분이었다. 사장님에게 보낼 문자를 적는 도중에야 이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지금도 그때부터 단골이었던 손님들이 오시긴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시절만의 감성이 그리울 때가 있다. 툭하면 언쟁하기 일쑤고, 하루에도 몇 번씩 크고 작은 감정의 골짜기를 넘어야 하는 엄마를 사장으로 모시는 건 꽤 지친 일상이 되었다. 진을 다 빼고 나면, 그저 집에 들어가 잠들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엄마와 훨씬 오랜 시간 일을 한 셈이지만 아직도 이렇게 변해버린 카페가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서 어반자카파의 음악을 틀어놓고, 잠시나마 그때의 감정을 느껴보면서 글을 적고 있다. 몸도 마음도 너무 피로한 하루지만, 소중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오늘 밤엔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잘 보내다 보면, 언젠가 오늘의 심비디움에도 새로운 여름이 올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