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모차르트②]모차르트 아버지와 모차르트 아내가 나란히 누워 있다고?
[우리가 몰랐던 모차르트②]모차르트 아버지와 모차르트 아내가 나란히 누워 있다고?
  • 이채훈 클래식 칼럼니스트/서울문화투데이 클래식전문 객원기자
  • 승인 2022.02.0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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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zart Wearing Sunglasses Art Board Print ⓒSuper Merch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라는 도시 자체를 미워했다기보다 차별의 상징이자 음악의 굴레인 이 도시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모차르트는 오페라에서 언제나 개인의 존엄, 자유와 평등, 사랑과 화해를 예찬했다. 이런 모차르트에게 잘츠부르크는 자신이 추구하는 모든 인간적 가치와 예술적 이상의 정반대를 강요하는 구시대 악습의 결정체였다. 개인적인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차르트는 시민민주주의 혁명의 시대를 살았다. 그가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정면충돌하고, 허허벌판인 음악 시장에 자유음악가로 뛰어든 것은 단순한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엄연한 세계사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모차르트가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 준 고향을 미워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 동안, 모차르트는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를 그리워한 것만큼 고향에 대한 애착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베토벤의 경우 22살 때 고향 본을 떠나 57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빈에서 살았다. 그는 친구 베겔러Wegeler에게 “고향의 어릴 적 풍경은 언제나 눈앞에 보듯 생생히 떠오른다”며 절절한 그리움을 토로한 바 있다. 모차르트 역시 피와 살로 된 인간이었으므로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한창 성공을 위해 분투하던 35살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고향을 차분히 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어린 시절 파리와 런던을 여행하느라 오래 집을 떠나 있을 때 고향 친구들이 보고 싶다며 울음을 터뜨린 모차르트 아닌가. 14살 때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잘츠부르크에 있는 누나에게 이웃집 소녀, 심지어 반려견의 안부까지 물어본 다정다감한 모차르트 아닌가.   

잘츠부르크에는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장소가 하나 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가 잠들어 있는 성 세바스찬 성당 묘역이다. 레오폴트의 묘 곁에는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묘가 나란히 있다. 우습고도 서글픈 풍경이다. 모차르트는 25살 때 빈에서 자유음악가로 데뷔하여 잘츠부르크를 영영 떠났다. 아버지는 아들의 ‘무모한 도전’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아들이 콘스탄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여성에게 넋이 나가서 빈에 주저앉은 게 아닌지 의심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두 사람의 결혼에 반대했다. 1787년 67살의 나이로 잘츠부르크에서 숨을 거둔 레오폴트, 1842년 80살로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난 콘스탄체, 두 사람은 죽은 뒤에 화해한 걸까? 

콘스탄체는 1791년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직후 그의 시신이 실종되게 만든 혐의로 전기 작가들의 쓰디쓴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1809년 덴마크 외교관 게오르크 니센(Georg Nissen, 1761~1826)과 재혼했는데, 니센은 콘스탄체의 증언을 토대로 모차르트의 전기를 썼다. 이 전기를 준비하기 위해 두 사람은 1820년 잘츠부르크로 이사했고, 여기서 피아노 교습을 하며 살고 있던 모차르트의 누나 마리아 안나(Maria Anna, 애칭 난네를Nannerl)을 만났다. 37년만의 재회였다. 난네를은 69살, 콘스탄체는 58살이었다. 난네를은 “동생은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여성과 결혼했다”며 평생 콘스탄체를 싸늘한 시선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제 그 아픔도 먼 옛날 일이었다. 난네를은 동생이 생전에 보낸 400통 가량의 편지와 소중한 악보들을 콘스탄체에게 넘겨주었다. “모차르트는 진실되게 사랑하는 남편이었어요.” 콘스탄체는 니센에게 이렇게 말했고, 이 말은 니센이 쓴 전기에 기록됐다. 

난네를의 무덤은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지인 성 페터 수도원에 있다. 잘츠부르크의 수호성인 성 루페르트St Lupert가 696년 건립한 유서 깊은 곳이다. ‘잘츠부르크’란 도시 이름을 지은 사람이 바로 성 루페르트다. 모차르트는 1783년, 결혼한 이듬해, 아버지와 누나의 축복을 구하기 위해 잘츠부르크를 방문하여 대미사 C단조 K.427을 초연했다. 바로 이 수도원이었다, 모차르트가 고향 잘츠부르크의 악사들을 지휘했고, 콘스탄체가 소프라노를 맡아 노래했다. 그녀가 이 미사곡에 나오는 ‘사람의 몸으로 나시고’Et Incarnatus Est를 불렀을 때 아버지와 누나가 감동하지 않았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콘스탄체를 향한 두 사람의 싸늘한 마음은 좀체 따뜻해지지 않았다. 생명의 탄생과 신비를 예찬하는 이 노래는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 준다. 이 수도원에서 대미사 C단조를 연주한 게 잘츠부르크에 대한 모차르트의 마지막 추억이 됐다. 


*지난호 칼럼부터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 상식을 더해드리기 위해 퀴즈를 넣었습니다. 댓글로 정답을 맞춰주시면 되겠습니다. 정답은 맞추시는 분 중 한 분을 추첨해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편집자 주)

지난호 퀴즈1 정답 : ④주피터 교향곡 

퀴즈2. ‘사람의 몸으로 나시고’(Et Incarnatus Est)가 나오는 모차르트의 종교음악은 무엇인가?          
① 레퀴엠 D단조        ② 모테트 ‘기뻐하라 환호하라’        ③ 대미사 C단조        ④ 아베 베룸 코르푸스 

                                                                                                              (정답은 다음호에 공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