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대(代)를 이은 무용가의 삶
[성기숙의 문화읽기]대(代)를 이은 무용가의 삶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02.1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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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겨울의 끝자락에서 의미있는 공연이 있었다. “그 길 위에 서다”(2022년 2월 6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를 타이틀로 한 쿰(KUM)무용단이 마련한 무대다. 제1부에서는 영상기록을 통해 쿰무용단의 과거를 조망했고, 제2부에서는 김운미 교수를 필두로 그의 제자들이 함께 출연한 가운데 이매방류 승무(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가 무대에 올랐다. 마지막 제3부는 쿰무용단의 미래를 전망케 한 무대로 서연수 안무, 강요찬 연출의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가 공연됐다. 한마디로 쿰무용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고 있다.

작품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는 군무 중심의 집단적 역동성이 과시된 가운데 흑백의 명징한 대비와 조화, 그리고 정중동적 움직임의 완급 조율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모던한 이미지를 주조로 작품 속 깊은 곳에 터잡은 한국춤 고유의 질감 내지 결 고운 아름다움의 극적 표현은 창조적 변용의 산물로 해석된다. 쿰무용단의 창작이념이 ‘전통의 현대화’임을 새삼 일깨운다.

주지하듯, 쿰무용단은 한양대 한국무용 전공 김운미 교수를 사사한 졸업생으로 구성된 동문단체다. 1993년 창단된 이래 지난 30여년의 활동을 통해 한국창작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 중심에 김운미가 있다. 이번 공연은 김운미 교수의 정년퇴임과 맞물려 그 의미가 더욱 배가됐다.

무용가 김운미는 그의 모친 이미라(李美羅, 1930~ )가 키웠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30여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전국 전통무용가 현장조사 때 대전 대흥동의 무용연구소에서 이미라 선생과 처음 조우했다. “우리 딸이 한양대 김운미 교수”라며 흐믓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월남(越南) 무용가인 이미라의 일생은 드라마틱한 서사를 담고 있다. 1930년 함경도 함흥에서 출생한 이미라는 17세때 최승희 무용에 매료되어 그의 문하생이 된다. 당시 최승희는 북한의 노동당 문화시책에 따라 지방 순회공연에 나섰고, 그 일환으로 함흥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로 여겨질 정도로 춤추는 최승희는 이미라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미라는 최승희무용단 신입단원 오디션에 응시해 최종 선발됐으나 집안의 반대로 합류하지 못했다. 이후 가족 몰래 평양으로 도망하여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에 입소하는데 성공한다. 최승희 문하에서 춤공부를 하던 중 부친이 찾아와 다시 함흥으로 회향하기에 이른다. 함남체육전문학교 체육과에 입학하여 체조와 발레, 현대무용 등을 배우면서 무용창작에 차츰 눈을 뜨게 된다.

그 무렵 함흥에 머물러 있던 전통춤꾼 장홍심과도 조우한다. 함흥 태생인 장홍심은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의 제자다. 권번 예기(藝妓) 출신인 장홍심은 이미 명무의 반열에 있었다. 이미라는 장홍심 밑에서 검무, 살풀이춤을 습득하고, 권번 출신 노기(老妓)들을 찾아가 손춤, 기본춤 등을 배웠다. 고향 함흥에서 익힌 기방계열의 전통춤은 월남 후 창작활동을 하는데 값진 자양분이 되었다.

6.25전쟁은 무용가 이미라의 춤인생을 통째로 바꿔놨다. 백두산으로 국군위문공연을 갔다가 전쟁이 터져 부모형제와 이별을 고하고 고향을 떠나 남하했다. 남(南)으로 향하는 마지막 배에 승선하여 가까스로 월경(越境)에 성공한다. 거제도, 부산을 거쳐 서울수복 때 대전에 둥지를 틀었다. 월남한 이들이 대개 서울이나 부산 혹은 인천에 터 잡았던 것과 달리 이미라는 한반도의 심장 대전에서 삶을 꾸렸다. 이미라에게 대전은 제2의 고향과 다름없다.

대전에 둥지를 튼 이미라는 1956년 이 지역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열었다. 대전광역시 제1호 무용연구소로 기록된다. 한편 대전의 명문 호스돈여고 무용교사로 적을 두고 무용학원을 병행하며 지역의 무용인재를 발굴, 육성했다. 이렇듯 이미라는 대전의 춤 텃밭을 일군 지역 제1세대 춤꾼으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미라의 업적 중 창작활동은 특히 눈여겨볼 대목이다. 1958년 첫 안무작 ‘금수강산’을 비롯 1960년 선보인 '성웅 이순신', '유관순 열사' 등이 대표작에 속한다. 왜군에 맞서 싸운 이순신이나 독립운동가 또는 애국지사 등 역사인물을 소재로 한 무용극 형식의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우선, ‘성웅 이순신’은 1972년 아산 현충사 건립 당시 뜰에서 초연된 후 청와대, 국립극장 등 중앙무대에서 공연되어 주목을 끌었다. 나아가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전국순회공연을 통해 국민들에게 충효정신을 일깨웠다고 전한다. 작품 ‘유관순 열사’는 1987년 천안에 설립된 독립기념관 개관 때 초청받은 이래 매년 8.15광복 기념공연 무대에 올랐다. ‘성웅 이순신’과 ‘유관순 열사’는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이 대본을 집필하였고, 무용가 이미라가 안무와 연출을 맡았다. 역사 속 영웅이나 순국선열을 주제로 한 장대한 스케일의 작품은 역사무용극으로 손색이 없다.

이미라는 지역의 무형유산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충남지역에 잔존하는 여러 민속놀이를 발굴하고, 백제문화제 등 지역 축제의 초석을 다지는 일에도 앞장섰다. 청양 출신 민속학자 임동권 교수의 요청으로 부여의 은산별신굿을 복원 재현하는 작업에 동참하여 국가무형문화재 제9호로 등재되기까지 산파역할을 한 것으로 전한다. 그밖에 아산줄다리기, 백제 산유화가, 거북놀이 등 충청지역의 무형유산을 발굴하여 전승의 맥을 이어주는데 일조했다.

오늘의 대전, 충청지역의 무용이 있기까지 이미라는 화수분과 같은 존재다. 해방이후 볼모지와 다름없던 대전 및 충남지역에 무용교육자로서 혹은 예술행정가로서 기여한 공로가 적지 않다. 회고해 보건대, 김운미 교수 또한 모친 이미라 선생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닮아있다. 김운미는 4세 때 모친에게 배운 춤솜씨로 유년시절 각종 무용콩쿠르에서 수상을 독차지했으며 중앙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일찍이 선화무용단(리틀엔젤스예술단 전신) 제1기생으로 발탁되어 세계무대를 누볐다. 이때 다져진 특별한 공연문법은 무용가 김운미의 성장에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김운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다음 세 가지다. 우선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집요한 탐구다. 일제의 지배와 탄압을 묘사한 ‘조선의 눈보라’, 3.1운동 사건을 옴니버스 스타일로 접근한 ‘1919’ 등이 대표작에 속한다. 6.25 전쟁의 상흔을 다룬 ‘그 한 여름’과 20세기 격동의 한국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담아낸 ‘축제’ 등 역사와 현실을 주제로 한 안무는 이른바 ‘다큐 댄스’(documentary dance) 형식을 탄생시켰다.

두 번째 키워드는 ‘여성’으로 집약된다. 여성의 실존에 대한 새로운 눈뜸과 자각에서 비롯된 ‘온달’, ‘함’시리즈 등이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 키워드는 ‘화해와 상생’이다. 대립과 갈등을 넘어 삶과 죽음, 생명과 존재성에 대한 깨달음에 기원한다. 즉흥성, 제의성, 신화성 그리고 근원으로의 탐색에서 집요하고 끈질긴 안무근성을 엿본다.

결론적으로, 격동의 근현대사를 관통한 척박한 토양에서 역사와 현실, 여성문제에 이르기까지 당대적 문제의식으로 접근한 김운미의 예술관 저변에 깃든 소위 앙가주망(engagement)적 태도와 자세는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무용평론가 이근수의 표현대로, ‘단단한 지성과 신선한 감성’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세속적 관점에서 김운미는 성공한 무용가라할 수 있다. 한양대 무용과 교수, 한국무용사학회장, 문화예술위원회 위원, 무형문화재위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춤 제3세대를 대표하는 무용가로서 안무가와 교수를 지냈고, 무용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각종 정책전문가 타이틀을 달며 무용행정가로서도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다.

김운미 교수의 정년퇴임 기념으로 마련된 쿰무용단의 “그 길 위에 서다” 공연은 진한 감동과 잔잔한 여운을 남긴 무대로 기억된다. 교수로서의 정년퇴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창작과 교육을 병행하면서 한국창작춤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김운미 교수의 예술적 내공과 다양한 경륜이 향후 무용계 발전에 가치롭게 기여되길 바란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