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2021년, 내가 본 좋은 무용작품 10 편
[이근수의 무용평론]2021년, 내가 본 좋은 무용작품 10 편
  •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2.02.1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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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경희대 명예교수

넘쳐나는 백신도 코로나의 기세를 꺾지못한 2021년이었다. 많은 작품을 보지 못하고 보고 싶은 공연을 여러 번 놓친 아쉬운 해이기도 했다. 제한된 여건 아래서도 무대공연을 성사시킨 무용가들의 열정은 놀라웠다. 어렵게 추린 10편을 공연일자 순으로 다시 소개한다.  

1. 노정식의 ‘왜곡’(歪曲, 3.6~7, 대학로예술소극장)은 ‘Memory’(2014), ‘Who am I’(2017), ‘프로젝트-망각’(2017), ‘파편’(2020)으로 이어지는 기억연작에 ‘타인의 기억’(2021)을 추가하여 내놓은 60분 작품이다. “당시에는 올바른 길이라고 선택했는데 그 선택의 결과가 다른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 상처가 되었다. 내 기억들을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싶다.” 노정식이 기억들에 집착하는 이유다. 2010년 이후 노정식이, ‘상처’, ‘소풍, ’거인들‘에서 보여주었던 삶과 자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거쳐 내면으로 눈을 돌려 자신의 치유와 회복은 물론, 상처받은 이 시대 관객들을 위로하는 단계로 확장해가고 있음을 보여준 의미있는 작품이었다. 

2. 국립현대무용단의 ‘빨래’(3.19∼21, 자유소극장)는 남정호의 1993년 초연작의 리메이크 판이다. 무대에 비스듬히 경사진 언덕을 만들고 경사를 따라 흐르는 물가에 주저앉아 여인들은 수다를 떤다. 빨래는 노동이지만 운동이고 놀이기도 하다. 빨랫감을 깨끗이 하는 행위라는 면에서 목욕과 통하고 정보를 교환하고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점에서 치유의 시간이기도 하다. 소박맞은 조강지처의 슬픔, 집 떠난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남편을 찾아 떠나는 미얄할미의 사연이 구성진 판소리를 통해 이 시대 여인들과 소통하는 접점이 된다. 그들이  외로움과 기다림 가운데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소통이란 메시지가 읽혀진 작품이었다.      

3. 정영두의 ‘제7의 인간’(6,4~5, LG아트센터)은 헝가리 민중시인 아틸라 요제프의 시에 영감을 받은 존 버거/장 모르 소설이 원작이다. 2010년 초연에 이어 그는 유럽이주노동자들의 고단한 운명과 일상을 8개 단락으로 나누어 순서대로 추적한다. 각 단락마다 이주민들이 겪는 과정이 독특한 음악으로 표현된다. 3부로 구성된 음악 중 1부의 서정성과 2부의 쾌활함, 3부의 고요함이 서정적인 여성 3인무와 경쾌한 남성 4인무, 남녀혼성의 6인무와 순서대로 매치된다. 구스타프 말러의 Titan 3악장을 배경으로 컨테이너박스를 탈출하는 피날레 장면에서 20년 역삼동 시대를 마감하고 마곡지역으로 떠나는 LG아트센터의 미래가 오버랩 된 작품이었다.

4. 장혜림의 ’침묵‘(6.24~26, M극장)은 헤르타 뮐러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숨그네‘가 원작이다. 공연은 50분 시간 대부분 소리를 지운 채 진행된다. 여자무용수들의 팔 동작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숨소리만이 작은 무대를 빼곡히 채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전쟁의 위험이나 재해로 인한 상실감을 표현했던 전작들과 달리 2021년판 침묵은 공정성이 상실되고 기득권자에 의한 성폭력이 빈발하는 주변을 바라보면서 젊은이들이 느끼는 고통과 박탈감에 주목한다. 그들이 느끼는 절망과 무력감이 어두운 조명아래 6명 무용수들의 극한적인 몸짓으로 채워진다. 무용가의 99% 땀을 채우는 1%의 영감이 살아있기에 예술이 가치 있음을 확인시켜준 작품이었다. 

5. 이경은의 ‘브레이킹(Breakimg)’은 국립현대무용단이 김설진, 김보람, 이경은 세 명의 현대무용가에게 힙합을 사용한 작품을 만들도록 기획한 <HIP 合>(8.20~22, CJ토월극장)공연 중 한 작품이다. ’현대무용+힙합+국악’의 요소를 한 무대 위에서 골고루 섞어 만들어낸 비빔밥 같은 작품이다. 메시지전달보다 음악에 맞춘 자유로운 몸 자체의 반응을 중시하는 힙합의 특징을 살려 이경은은 장르, 소리, 연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모두 깨는 춤을 시도한다. 출연자들은 제멋대로 무대로 등장해서 마음대로 움직이고 제 나름의 놀이를 자유롭게 즐긴다. 자유로움이라는 수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작품의 질서를 형성해가는 모습을 보여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6. 배진호의 ’Saliva or Blood(침 혹은 피)‘는 한예종 출신 한국무용전공자 들로 구성된 '알티밋(Altimeets)'무용단의 두 번째 정기공연(8.28~29,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무대에 오른 세 작품 중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젊은이들의 지극한 관심사면서도 작품의 소재로 택하기엔 부담스럽던 '성(Sexuality)‘문제가 정면에서 다뤄진다. 성행위 자체가 말이 필요 없는 몸만의 대화란 점에서 춤과 상통한다. 배진호는 “모두의 관심사면서도 남들이 나서기를 꺼려하는 주제, 호기심, 체험에서 우러난 상상력”에서 안무의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날 공연의 주제와 일치하는 대답이다. 그의 다짐이 무용가로 존재하는 동안 오래도록 지켜지길 바란다. 

7. 국립무용단의 ‘다섯 FIVE 오’(2021,9,2~5, 국립극장 달오름극장)는 국립무용단장에 취임한 손인영의 첫 작품이다. ‘다섯 오’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인간의 욕심으로 무너진 자연 질서를 5방처용무(五方處容舞)의 뿌리가 된 음양오행설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채색된 유리조각을 주렴처럼 달아내려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가르고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세련된 의상으로 자연의 순환을 설명하는 정민선의 감각적인 무대미술은 남기윤의 드라마트루기와 부합되고 라예송의 음악은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의 섬세한 춤과 잘 어울렸다. ‘자연회귀’라는 신선한 주제와 이를 뒷받침한 정교한 안무가 빛났던 작품이었다. 

8. 김원의 ‘걷는 사람’은 국립현대무용단이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세 명의 안무가에게 맡겨 작품을 안무하게 한 기획공연 중 하나다. 24개 노래로 짜인 연가곡 중 #1 ‘밤인사’, #4 ‘동결’, #20 ‘이정표’가 춤의 텍스트로 선택되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노랫말들에 김원은 무용가로서 자신이 거쳐 온 삶의 과정을 투영한다. 묵직한 베이스음악, 피아노와 아코디언 연주, 시낭송이 춤과 일체가 되어 무대 위에 펼쳐진다. 뜨겁게 응축된 한을 풀어 헤쳐 가는 치열함과 함께 회한의 정밀(靜謐)함이 느껴지는 춤사위다. 세 작품 중 슈베르트 음악의 정조(情調)를 충실하게 흡수하면서 자신의 세계와 일치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9. 차진엽의 ‘수평의 균형’에선 그리움의 대상이 무용수의 몸으로 치환된다. 천정에서 내려진 철봉이 공중에서 균형을 취하려 애쓰는 사이 차진엽의 유연한 몸이 어둠 속을 유영하듯 무대를 누빈다. 철봉이 균형을 찾을 때 무용가의 몸도 휴식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나그네 중 선택된 노래는 #10 ‘휴식’, #15, ‘까마귀’, #24, ‘거리의 악사’다. 휴식이 필요하지만 춤꾼의 본능은 휴식을 용납하지 않는다. 춤꾼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무용수의 몸으로 표현된다. 무대 위를 하얗게 덮은 흰 눈 속에서 힘겹게 일어난 여인이 손을 흔들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겨울나그네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또 다른 서정적 아름다움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10. 정영두의 ‘구두점의 나라에서’(10,22~24, 토월극장)는 독일시인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타인의 동시에 인도출신 영국 그래픽 디자이너 라트나 라마나탄의 그림이 덧붙여져 완성된 시화집이 원작이다. 무대미술과 의상에 정민선, 음악에 신동일 작곡가와 듀얼 피아니스트로 신은경, 안지아가 참여했다. 원작의 스토리는 <평온-위험-대결-살육-진압-평온>의 순서로 전개되지만 정영두는 이러한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때로는 보랏빛 조명이 비추는 텅 빈 무대에 음악만이 울려 퍼지며 피아노 콘서트 장을 방불케도 한다. 호두까기인형에 필적할만한 재미있는 소재를 가진 이 작품이 어린이와 어른들이 연말이면 찾게 되는 레퍼토리작품으로 거듭 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