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뷰]“물에 비추어 인간의 삶을 고찰하다”…젊은 소리꾼이 그리는 늙은 왕 ‘리어‘
[현장리뷰]“물에 비추어 인간의 삶을 고찰하다”…젊은 소리꾼이 그리는 늙은 왕 ‘리어‘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2.02.2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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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두·배삼식·한승석·정재일 의기투합
무대 위 20톤의 물, 작품 전반을 휘도는 공감각적 물의 심상
3.17~27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이 우리 고유의 언어와 소리로 새롭게 탄생한다. 국립극장 전속단체 국립창극단(예술감독 유수정)이 내달 17일부터 27일까지 창극 ‘리어’를 달오름극장에서 초연한다. 

창극 ‘리어’는 시간이라는 물살에 휩쓸려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2막 20장에 걸쳐 그려낸다. 창극을 위해 극본을 새롭게 집필한 배삼식 작가는 삶의 비극과 인간에 대한 원작의 통찰을 물(水)의 철학으로 일컬어지는 노자의 사상과 엮어냈다. 리어와 세 딸, 글로스터와 두 아들의 관계를 통해 서로의 욕망을 대비시키면서 세대와 관계없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한다. 

▲국립창극단 ‘리어’ 기자간담회
▲국립창극단 ‘리어’ 기자간담회 (왼쪽부터)유수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정영두 연출, 소리꾼 유태평양, 소리꾼 김준수, 배삼식 작가, 이태섭 무대디자이너, 한승석 음악감독 ⓒ국립극장

무용⸱연극⸱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하는 정영두가 연출과 안무를, 한국적 말맛을 살리는데 탁월한 극작가 배삼식이 극본을 맡았다. 음악은 창극 ‘귀토’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등에서 탄탄한 소리의 짜임새를 보여준 한승석이 작창하고 영화 ‘기생충’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이 작곡한다. 

첫 창극 연출에 도전하는 정영두 연출은 23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 ‘리어’ 기자간담회에서 “국립창극단이 소리를 중심으로 한 중요 작업들을 많이 해와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림 안에 어렵지 않게 들어간 것 같다. 소리로 듣는 우리 음악은 느낌이 많이 다를 것”이라며 “극 중 ‘내 꿈은 한 줄 바람에도 쉬이 흐려지도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힘들 때마다 이 구절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다. 작은 바람에도 잘게 떨리는 마음을, 작품을 통해 가다듬고 단단해지려 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배삼식 작가는 “이 작품은 피하고 싶지만 결국 마주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다. 마지막을 생각하면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애달프다. 잔혹한 세계에서 살아있기 위해 애쓰고 분투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안쓰러워하고 가엾어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이 이야기가 의미있을 것이다. 삶의 진면목은 명명백백하지 않고, 우리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그 곳에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곧 이 작품 전체를 떠받드는 토대가 됐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원작은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인과응보, 권선징악 등 우리가 기대하는 정의와는 다르게 흘러간다. 이를 통해 ‘천지불인(天地不仁)’,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어질지 않다는 노자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됐다. 인의예지라는 틀 안에 어떻게든 삶을 우겨 넣으려는 도덕과 윤리가 지나치면, 억압이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읽혔다”라며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가엾어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면, 이 이야기가 가지는 의미는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음악을 만나, 언어로 미처 전하지 못한 부분이 창극의 형태로 전달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작창가 한승석은 상하청을 넘나드는 음과 부침새(장단의 박에 이야기를 붙이는 모양)를 다채롭게 활용한다. 증오‧광기‧파멸 등 비극적인 정서를 담은 무게감 있는 소리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면서도 ‘장기타령’, 서도민요 중 ‘배치기’ ‘청사초롱’ ‘투전풀이’ 등 대표적인 경기민요를 장면에 맞게 차용해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작품 분위기에 활기를 불어넣고 소리 색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작곡을 맡은 정재일은 국악기와 서양 악기가 어우러진 13인조 구성의 음악과 가상악기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앰비언트 사운드를 절묘하게 조합해 작품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한 감독은 “증오, 광기, 파멸, 음모, 배신 등 텍스트가 전통의 소리와 다른 정서이기에 판소리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라며 “고심 끝에 같은 음계임에도 불구하고 운영을 달리하는 등 전통 판소리에서 벗어나 기존에 생각하지 못한 부분으로 확장했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새로운 영역을 창작한 것 같아 뿌듯함도 있다”라고 전했다.

▲국립창극단 ‘리어’ 무대디자인 스케치 ⓒ이태섭
▲국립창극단 ‘리어’ 무대디자인 스케치 ⓒ이태섭 무대디자이너

또한 제31회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무대미술가 이태섭을 필두로, 창극 ‘패왕별희’에서 감각적인 조명디자인을 선보인 조명디자이너 마선영, 연극·무용·오페라 등 장르를 넘나들며 활약하는 의상디자이너 정민선, 분장디자이너 정지호 등이 참여해 함께 무대를 꾸민다. 이들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연약한 인간의 존재를 자연의 질감과 빛으로 구현하며 작품에 힘을 싣는다. 무대는 고요한 가운데 생동하는 물의 세계로 그려낸다. 폭 14m와 깊이 9.6m 크기에 달하는 무대 세트에 총 20톤의 물이 채워지며, 수면의 높낮이와 흐름의 변화를 통해 작품의 심상과 인물 내면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잔잔하게 흐르던 저수지의 둑이 터져 물이 넘치고, 얼어붙은 물이 녹아내리는 등 변화무쌍한 물의 속성은 ‘리어’의 비극적인 이야기의 흐름과 닮아있다. 

무대미술가 이태섭은 “무대 위에 커다란 수조가 설치되고 극이 시작하면 물이 서서히 빠져나가며 연기를 위한 단이 드러난다. 잔잔한 물이 반사되고 왜곡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표현하려고 했다. 배우들이 물을 움직이면서 튀기는 등 ‘자연이 결코 어질지 않다’는 작가의 큰 의도를 반영하고자 했다. 인간 자체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런 자연의 물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라며 “무대 위에 거대한 자연의 이미지를 축소시켜 구현하지만, 연극적 상상력을 통해 자연의 변화와 인물 심리의 변화가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국립창극단 ‘리어’ 기자간담회
▲국립창극단 ‘리어’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왼쪽부터) ‘리어’ 역을 맡은 소리꾼 김준수, ‘글로스터’ 역을 맡은 소리꾼 유태평양 ⓒ국립극장

화려한 제작진만큼이나 고정관념을 과감히 깬 캐스팅도 눈길을 끈다. 국립창극단 간판스타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각각 리어와 글로스터 역을 맡았다. 이들은 ‘나이 듦’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인물이 처한 상황에 집중하며 분노와 회한, 원망과 자책으로 무너지는 인간의 비극을 섬세하게 표현할 예정이다. ‘작은 거인’ 민은경은 막내 딸 코딜리어와 광대를 오가는 1인 2역 연기를 펼치며 극과 극 매력을 선보인다. 명료한 역할 분석과 무대 위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여주는 이소연이 첫째 딸 거너릴을 맡았으며, 호소력 짙은 소리를 지닌 왕윤정이 둘째 딸 리건을 연기한다. 이 외에도 에드거 역의 이광복, 에드먼드 역의 김수인 등 국립창극단 배우들이 참여한다.

리어 역을 맡은 김준수는 “사람들이 ‘리어왕’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보니,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어떻게 풀어야 할까’라는 고민보다는 ‘어떻게든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이미지나 나이와 관계없이 리어라는 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면서 관객의 공감과 이해를 끌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배역에 임하는 각오를 밝혔다.

글로스터 역을 맡은 유태평양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처음 접한 건 남아공에서 유학을 하던 중학생 때였다. 본의 아니게 영어 원문으로 접한 터라 어려운 단어들로 인해 완독이 힘들었고, 내 안에 어려운 작품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라며 “이 작품을 우리 창극단 무대에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선생님들께서 리어와 글로스터 역을 맡으실 거라 생각했는데, (김)준수 씨와 내가 맡게 돼 부담이 컸다. 여전히 역할에 대한 고민이 많지만, 연출님의 조언에 따라 나의 내면에 있는 걸 끌어내며 물 흐르듯 표현하다보니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국립창극단 ‘리어’ 기자간담회 단체사진 ⓒ국립극장
▲국립창극단 ‘리어’ 기자간담회 단체사진 ⓒ국립극장

아울러, 노역에 젊은 단원을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정영두 연출은 “‘왜 김준수라는 젊은 단원이 리어를 할까, 분장을 하려나, 어떻게 표현할까’라는 궁금증이 생겼고, 기대감을 유발했다면 일단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배역 캐스팅은 어느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닌, 여러 사람들이 소리의 결이나 작품 속 캐릭터 이미지 등을 보고 함께 결정한 것이다”라며 “무대에서 한 배우가 깊은 호흡을 가지고 관객을 바라보고 그들이 동하면, 외적인 부분과 상관 없이 그 사람의 심리나 역사가 보이는 것 같다. 내부에서도 우려가 있었으나 김준수, 유태평양 등 젊은 단원의 무대를 보고 충분히 그 이상의 아우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한두 가지 가졌던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고 주변의 우려에도 역으로 멋진 답이 될만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번 공연은 방역 당국의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별 실행방안에 따라 실시한다. 공연 예매·문의 국립극장 홈페이지(www.ntok.go.kr) 또는 전화(02-228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