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시] 이근배 예술원 회장, 고 이어령 장관 영전에...한 시대의 새벽을 깨운 빛의 붓, 그 생각과 말씀 천상에서 밝히소서
[헌시] 이근배 예술원 회장, 고 이어령 장관 영전에...한 시대의 새벽을 깨운 빛의 붓, 그 생각과 말씀 천상에서 밝히소서
  • 대한민국예술원 이근배 회장
  • 승인 2022.03.0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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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어령 선생님 영전에 올립니다

이땅의 흰옷의 백성들
독립 만세 산천을 흔들던 삼월입니다
남녘에서는 동백이며 매화 다투어
꽃소식이 올라오는 이 나라의 봄입니다
이어령 선생님
백천 번은 아니라도 새 생명이 신명으로 일어서는
열 번쯤의 봄이라도 더 기다리시라 했는데
어찌 이리 황망하게 떠나시는 것입니까
머리와 가슴 손끝에까지
산처럼 쌓이고 바다처럼 넘치는
생각과 말씀 그 첫 줄도 다 못 적으시고
어찌 붓을 놓으시는 것입니까
선생님은 처음 이 땅에 오실 때부터
훈민정음의 나라, 금속활자의 나라
팔만대장경의 나라, 고려청자, 조선백자의 나라의
정신문화 예술창조에 뜻을 입히고
생각을 깎고 다듬어서 인류 역사 위에 
드높이 올려세우라는 소명을 받고 오셨습니다
돌잡이로 책을 잡고
여섯 살에 몽당연필로 동화를 써
이미 “천재”의 이름을 얻으셨다지요
어린 날부터 읽은 세계 문학을 바탕으로
대학에서는 난해하다는 이상의 시를 쉽게 풀어내시고
달팽이껍데기 같은 한국문학의 낡은 권위에 도전
스물세 살에 쓴 “우상의 파괴”는
케케묵은 천장을 깨트리는 폭발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번뜩이는 감성, 꿈틀거리는 레토릭은
시와 소설과 평론과 에세이에서
모국어의 새 패러다임을 세우는 혁명이었고
개벽이었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이었습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저 60년대 비로소 문학책이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게 되었었지요
강단에서의 명강의와 신지식에 목마른 이들에게
명연설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우상으로 떠올랐습니다
분단의 나라에서 냉전의 벽을 깨뜨리는
서울올림픽의 한 마당을 가로지르는
굴렁쇠 소년이 바로 선생님의 모습이었고
새천년의 아침에 북소리로 띄운 해는
이 나라 5천 년 역사의 눈부신 새 아침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땅의 한 시대의 어둠을 새벽으로 이끈
선각이시며 실천가이셨습니다
붓의 시대에서 오늘의 AI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의 혜안은 먼 미래를 앞서 내다보셨고
새 이론의 창출은 어김없이 실용화되었습니다
어찌 이루 선생의 사봉필해(詞鋒筆海)를 헤아리겠으며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저술의 한 줄이라도 읽겠습니까
선생님은 대한민국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한예종을 비롯한 문화 대역사(大役事)를 이루셨으며
20세기 한국의 뉴 르세상스를 떠받친
메디치로 영원히 새겨질 것입니다
이어령 선생님!
선생님은 문단에 첫걸음 떼는 철부지 저를
손잡아 주시고 거두어주셨습니다
『이어령 전작 집』을 제게 맡겨 장정 편집, 출판에서
올해 50주년 맞는 「문학사상」 창간을 돕는 일에서
창조학교 멘토로, 예술원 회원으로, 회장으로
오늘의 제가 있도록 키워 주셨습니다
지난해는 편찮으신 몸으로
저의 “해와 달이 부르는 벼루의
용비어천가“ 전시에 오시어
참으로 뜨거운 덕담도 해 주셨지요
예순 해토록 선생님이 제게 주신
그 가르침의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선생님이 계시어 너무 행복했습니다
자랑스러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말로는
안 되는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마지막 뵈온 것은
임종하시기 이틀 전이었지요
손을 잡은 저에게 겨우 “이근배 병풍” 하시며
선생님의 병상 바로 앞에 펼쳐놓은
글씨도 안 되는 제가 쓴 가리개를 카리키셨지요
저는 북받치는 울음을 겨우 참고
문밖에 나오고서야 터뜨렸습니다
한국을 넘어 세계의 지성이요
시대를 넘어선 만대의 스승이신
이어령 선생님!
선생님의 아호가 밤을 넘어선다 뜻의
능소(凌宵)라 하였지요
계유생 닭띠여서 스스로 “새벽보다 먼저 오는
빛의 목소리”를 닭 그림 위에 쓰셨지요
부디 이제 하늘나라에 오르시어
이 땅의 한 시대의 정신문화를 일깨운
우주를 휘두르는 빛의 붓, 뇌성벽력의 그 생각과 말씀
천상에서 더 밝게 영원토록 펼치옵소서

 

2022년 3월 2일
삼가 후학 이근배 울며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