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영원한 현역’ 김병기 화백 별세
[부고] ‘영원한 현역’ 김병기 화백 별세
  • 이지완 기자
  • 승인 2022.03.02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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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상미술 1세대…한국 현대미술 토대 정립
2017년 ‘한 시대를 그리다’ 연재하며 한국 100년 미술사 구술 기록
지난해까지 신작 ‘저항-동청룡’, ‘저항-서백호’ 선봬

[서울문화투데이 이지완 기자] 한국 추상미술 1세대 작가이자, 최고령 현역 화가인 김병기 화백이 1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6세.

▲지난 2018년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특별대상 수상 이후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故김병기 화백 (사진=서울문화투데이)
▲지난 2018년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특별대상 수상 이후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故김병기 화백 (사진=서울문화투데이)

고인은 한국 근‧현대미술의 산증인이었다. 1916년 평양에서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로 불리는 김찬영 화백의 아들로 태어나 한국 추상미술 1세대로 한 시대를 이끌었다. 1933년에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해 동경 아방가르드 미술연구소와 동경문화학원 미술부를 졸업했다. 이중섭과는 평양보통학교 단짝이었고, 일본에선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등과 함께 수학했다.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을 접하며 추상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공부를 마친 후 1939년 한국으로 돌아와 ‘50년 미술협회’를 결성해 한국 미술계의 문을 열었다. 해방 후에 고인은 북한에서 북조선문화예술총연맹 산하 미술동맹 서기장을 지냈으나, 북한 공산주의에 회의감을 느끼고 1948년 월남한다.

이후 한국문화연구소 선전국장, 종군화가단 부단장 등을 지내며 화가, 비평가, 교육가, 행정가로서 한국현대미술의 토대를 정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 서울예술고등학교 미술과장을 거쳐 1960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를 창립했다.

▲지난 2018년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에 참석해 수상의 기쁨을 전하던 故김병기 화백 (사진=서울문화투데이) 

고인은 해방 이후 한국미술이 직면한 사회․문화적인 특수한 문맥과 서구미술의 수용이라는 특수성과 보편성의 관점에서 추상의 의미와 가치를 탐색하고 고찰했다. 추상미술형성 초기부터 서구미술 역사적 전개까지 면밀하게 아울러, 현대적 조형언어로서의 추상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찾아나갔다.

1965년 고인은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석한 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정착해 화가로서의 길에 매진했다. 서양문명 최전방에서 완성된 그의 작품은 상과 구상, 동양과 서양, 자연과 문명, 정신과 물질, 전통과 현재 등 관습적인 이분(二分)의 경계를 넘나들며 상반된 힘을 한 화폭 위에 긴장감 있게 묶어뒀다. 미국 생활 중 가나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회고전 《김병기: 감각의 분할》을 준비하며 고국으로 돌아왔다.

고인은 ‘영원한 현역’으로 불리는 작가였다. 2016년 가나아트센터에선 탄생 100주년 기념 단독 개인전을 열었고, 2017년 101세에 대한민국예술원 최고령 회원으로 선출, 2019년 103세의 나이에 가나아트센터에서 다시 한 번 개인전을 개최했다.

2017년엔 그의 구술을 통해 한겨레신문에 ‘한 시대를 그리다’가 연재됐다. 이중섭, 김환기, 이상, 김동인, 윤동주, 이쾌대 등 우리나라 문화계의 별들과 100년간의 문화사가 다시 한 번 우리 곁으로 자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고인은 2018년에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특별대상으로도 선정됐다. 당시 102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한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 “약한 것이 좋은 것이고 큰 것이다. 사람도 약할 때 더 강하다”라는 가르침과 함께 “이제는 그림으로 보여주고 싶다”라며 작품 활동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드러냈었다.

이후 본지와 진행된 인터뷰에선 시대정신이 담긴 미술의 리얼리티, 현실성을 강조했다. 또한, 한국 미술계의 큰 역사를 짚는 통찰로 한국 미술사를 ‘추상 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로 요약하는 평을 전하기도 했다. 인터뷰 말미에는, 40여 년간의 미국 생활과 그간의 시간들을 정리하며 “우리나라는 미술 수준, 예술 수준이 높은 나라다”라며 “한국이 이제 중심이다. 여러분들이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잘해줘야 한다. 1백 살이 넘으니 이제 뭐든지 양보해야한다(웃음). 내가 앞에 나설 수는 없다. 이제 여러분들의 몫이다. 여러분이 주인이다”라는 한 세기의 어른이 할 수 있는 덕담을 전했다.

▲지난해 '제42회 대한민국예술원 미술전'에 출품한 김병기 화백 2021년 신작 (좌측부터) 저항-동청룡, 저항-서백호 (사진=대한민국예술원 제공)  

고인은 지난해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고, 지난해 12월 열린 대한민국예술원 미술전에도 신작을 출품하는 등 100세 넘은 현역 화가의 모습을 끝까지 보여줬다. 지난해 고인이 제작한 신작 <저항-동청룡>과 <저항-서백호>는 고구려 벽화와 전통 오방색을 버무려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감염병에 대한 ‘저항’을 담아 제작한 작품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이는 나이보다 무슨 그림을 그리는 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던 고인의 지향은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1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4일 정오 12시다. 장지는 화성 함백산 추모공원이다. ☎02-3010-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