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문화지성 이어령이 춤계에 남긴 유산
[성기숙의 문화읽기]문화지성 이어령이 춤계에 남긴 유산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2.03.17 09: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br>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2022년 3월 2일, 서울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선생의 영결식이 엄수되었다. 장례위원장인 황희 문체부 장관의 조사, 고향 후배인 시인 이근배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과 제자인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추모영상에 비춰진 말년 선생의 초췌한 모습에 여기저기서 조용한 탄식이 쏟아졌다. 

이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학생들로 구성된 첼로앙상블이 ‘가브리엘 포레(Gabri el Faure)'의 '엘레지'(Elegie)를 연주했다. 무거운 침묵이 영결식 공간을 가득 채웠다. 진중한 첼로 선율은 슬픔의 깊이를 더했다. 전통예술원 공연단은 ‘이 땅의 흙을 빚어 문화의 도자기를 만드신 분이시여’를 노래했다. 통곡의 조창(弔唱)이 심금을 울렸다. 우리시대 최고의 문화지성 이어령 선생의 영결식은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엄숙하고 융숭깊게 치러졌다. 

지난 2월 26일 이어령 선생이 오랜 암투병 끝에 향년 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산천을 뒤흔드는 황망한 소식에 문화계는 충격에 빠졌다. 장례식은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내며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기틀을 세운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예우하기 위해 5일간 문화체육관광부장으로 거행되었다. 장례기간 동안 유족을 비롯 문체위 국회의원, 전·현직 문화부 장차관, 고위 관료, 문화예술계 인사 등 수천 명이 선생의 저승길을 지켰다. ‘코로나19’ 상황임에도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것은 그만큼 고인의 업적이 기념비적임을 웅변한다. 

1934년 충남 아산(옛지명 온양) 좌부동에서 출생한 이어령은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전문지 『문학사상』 발간, 영인문학관 설립 등 문학인으로서의 위상이 뚜렷하다. 선생은 일찍이 ‘우상의 파괴’로 구(舊)시대 문학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60년대엔 순수와 참여논쟁에 불을 당겼다. 문학 고유의 순수 자율성을 옹호하면서 소위 ‘순수파’의 표상으로 인식되었다.    

주지하듯, 이어령 선생의 본향(本鄕)은 문학이다. 그러나 선생은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문화예술 전반에 큰 족적을 남겼다. 문학의 경계를 넘어 인간 실존의 근원적 의식을 통찰하고 탐색했다. 창조적 발상의 다양한 실험은 한국 문화예술 전반으로 확산되어 긍정적 에너지를 낳았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든 이른바 통섭의 지적 모험은 다양한 직함을 탄생시킨 원천이 되었다.  

우리가 알 듯, 이어령 선생은 화려한 직함을 자랑한다. 생전의 선생은 문학평론가, 문예지 편집인, 칼럼니스트, 대학교수, 올림픽기획자, 문화행정가 등으로 불렸다. 열거하기조차 숨가쁠 정도다. 선생은 26세의 나이에 유력일간지 논설위원으로 데뷔할 정도로 출중한 필력의 소유자였다. 일평생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를 지내며 후학양성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총괄기획자로 ‘굴렁쇠 소년’을 탄생시켰고, 문화올림픽을 화두로 전통의 재해석을 통해 한국의 문화적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과시했다. 

1990년 노태우 정부 시절 초대 문화부 장관을 맡아 문화강국의 기틀을 다졌다. 문화관료의 깨어있는 감성을 자극하여 예술행정의 창의적 발상을 도모해 다양한 제도와 정책을 발굴하고 안착시켰다. 또한 선생은 인문학 분야의 스테디셀러 작가로서도 독보적 위치에 있다. 한국의 문화원형을 흥미롭게 분석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비롯 일본사회를 명쾌한 관점으로 통찰한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은 인문학도들의 필독서로 통한다. 선생은 수백 권의 주옥같은 저서를 통해 마음의 양식을 제공했으며, 만인에게 ‘생각하는 힘’을 길러줬다. 

무엇보다 이어령은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논리를 넘어 시대를 통찰하는 ‘거인’(巨人)으로 통했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선생을 일컫어, “책임있는 보수, 가장 폭넓은 보수의 자리를 지킨 진보의 옹호자였고, 민족문화의 개척자였고, 신개념의 구축자였고, 언어의 연금술사였고, 문사철의 통달자였고, 강연의 달인이었다”(한겨레, 2022.2.27)고 회고했다. 퍽 수긍가는 진단이다. 엄혹한 시절 이어령 선생의 비호가 없었다면 민족문학의 정수로 손꼽히는 『태백산맥』, 『아리랑』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한편,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은 빼놓을 수 없는 기념비적 업적에 속한다. 선생은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한예종이 개교 30여년 만에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예술교육기관으로 우뚝 선 것은 이어령 선생의 미래지향적인 혜안 덕분이라 하겠다. 선생은 이 땅의 척박한 토양에 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정성을 다해 가꾸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뿌린 문화의 씨앗을 먹고 자란 예술인재들이 한국을 넘어 세계무대를 누비고 있음에 새삼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  

이어령 선생을 처음 뵌 것은 2006년 연낙재(硏駱齋) 개관 무렵으로 기억된다. 연낙재는 조선후기의 문인 추사의 현판 ‘일금십연재’(一琴十硏齋)에서 글자를 따와 지은 이름이다. ‘한 개의 가야금과 열 개의 벼루’를 뜻하는 글귀엔 학문과 풍류를 숭상하는 문(文)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추사 김정희의 고향 예산은 충청도 내포(內浦)의 한복판을 점유한 유서 깊은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2006년 초봄 풍광을 자랑하는 평창동 중턱에 위치한 영인문학관을 방문하여 이어령 선생을 처음 만나뵈었다. 여러 대의 컴퓨터가 즐비한 가운데 벽면을 가득채운 서적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연낙재 탄생의 내력을 들으시곤 내포의 웅혼한 기운이 추사를 거쳐 오늘의 연낙재로 이어지는 것이라며 과분한 해석과 함께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 춤에 내재된 정신적 가치와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주셨다. 이후 평창동 아랫녁으로 옮긴 영인문학관을 드나들면서 문학전시회를 관람하고 강연에 참여하면서 정신적 자양분을 얻었다.   

선생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2007년 월간 『춤』지 발행인 조동화 선생의 독려로 춤의 선구자 조택원(1907~1976)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주도했다. 이어령 선생께 ‘조택원탄생100주년기념’이라는 친필 서체를 요청하였고, 이 글귀를 홍보인쇄물에 로고 개념으로 사용했다. 선생은 바쁜 일정에도 불구, 행사 개막식에 참석하여 진심어린 연설로 춤계를 응원했다. 

2014년 근대 전통가무악의 거장 한성준(1874~1941)의 탄생 140주년 기념행사 때에도 같은 인연이 반복되었다. 선생이 써준 ‘한성준탄생140주년기념’ 친필을 홍보인쇄물에 새겨넣었다. 이로 인해 행사의 문화적 향취가 배가됐다고 믿는다. 한성준을 주제로 한 대한민국전통무용제전이 공연·학술·기록을 표방하면서 지난 7년간 13권의 기록집이 출간된 성과는 이와 무관치 않다.  

이어령 선생과 관련한 또 하나의 특별한 기억이 있다. 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CAP(최고경영자 문화예술과정) 주임교수를 맡았었다. CAP 오픈강의 요청에 선생은 한예종 설립 비화를 들려주면서 흔쾌히 수락했다. 특유의 달변으로 젓가락론, 보자기론 등을 설파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잊혀진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재발견의 안목은 CEO 수강생들에게 창의적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는 계기를 제공했다. 번뜩이는 천재성이 강연장을 압도했던 기억이 새롭다. 

2017년 늦가을 어느날, 영인문학관에서 이어령 선생을 뵈어야 한다는 전갈이 왔다. 곧이어 연극평론가 이태주 선생이 전화하여 다급한 목소리로 성 교수는 이어령 선생을 꼭 만나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마도 몹쓸병 암이 발병된 무렵이었을 게다. 식사를 곁들인 서너 시간의 만남이 이어졌고, 선생은 춤을 주제로 쉼없이 여러 말씀을 열정적으로 쏟아냈다. 

춤이란, ‘몸으로 문자를 만드는 것’이라며, 몸의 문자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선 문사철(文史哲)에 대한 깊은 통찰이 전제돼야함을 힘주어 말씀하셨다. 우리 고유의 춤 문법과 근원 그리고 신체지도(身體地圖)에 담지된 인문적 탐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나아가 최첨단 기술의 시대 지속가능한 예술의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탐문의 자세와 더불어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다시피, 한성준은 충청도 내포가 낳은 대표적 전통예인으로 20세기 한국 전통가무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견인한 선각자다. 한성준을 사사한 조택원 역시 일제강점기 세계적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로 명성이 높다. 이어령 선생이 태어난 아산은 넓은 범주에서 내포에 포함된다. 선생이 춤의 선구자 한성준·조택원을 기리는 행사의 타이틀을 친필로 써주신 것, 그리고 추사의 정신과 맥이 닿아있는 연낙재의 존재와 행보에 관심과 성원을 아끼지 않은 것은 이른바 내포를 의식한 동질적 유대감이 작동된 결과의 소산이라 여겨진다. 

변방의 장르인 춤은 이어령이라는 문화지성을 통해 미몽(迷夢)에서 깨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은 춤이 우리 민족문화유산의 정점에 있음을 일깨웠다. ‘이어령 텍스트’ 속 춤의 정신과 사상을 집적하여 미래유산으로 남기는 일, 벅찬 과제를 눈 앞에 두고 있다. 문화지성 이어령 선생이 춤계에 남긴 정신적 유산을 새삼 곱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