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nterview]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공예) 수상자 이칠용 한국공예예술가협회 회장 “전통공예 홀대에 명인들의 한은 쌓여간다”
[Special Interview]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공예) 수상자 이칠용 한국공예예술가협회 회장 “전통공예 홀대에 명인들의 한은 쌓여간다”
  •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
  • 승인 2022.03.16 1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공예박물관서 공예품 수리장터 열리길 바라
공예인 소외됐던 서울공예박물관의 개관식, 참담한 느낌
학자들만 우선시 되는 현실, 현장 기술자도 함께 나아가야 해
국중박 《漆, 아시아를 칠하다》 전시도록 오류 많아
시작부터 잘못된 나전칠기 역사, 오류 수정되지 않은 게 몇 십 년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이지완 기자] “노인이 한 명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긴 생애를 살아온 한 인간이 갖고 있는 정보와 지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의미하는 말이다. 국가는 이처럼 쉽게 잃어버릴 수 없는 도서관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이 ‘무형문화재’에는 공예‧미술 등에 관한 전통기술이 속해 있다. 나전장, 자수장, 조각장 등 이 기술들은 사람의 손과 손으로 이어지는 유산이다. 더군다나, 이 유산은 어떤 분야에서 기예가 뛰어나 유명한 사람 ‘명인(名人)’에 이르러야 손과 손으로 이어지곤 한다.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이칠용 한국공예예술가협회 회장 ⓒ서울문화투데이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빠르게 잊히는 때다. 한 분야에서 작은 빛을 틔워보겠다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 한 세월을 보내고 나면, 세상에서 아주 까마득하게 잊힌 다음일지도 모른다. 한 분야를 진득히 파고들어 놀라운 작품을 만드는 이들은 국가가 보존해줘야 하는 것이 의무인 때다. 그런데, 단순히 지켜주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사람과 사람으로 전승되고, 국가와 지역이 오랫동안 기억하고 이어온 무형 유산 기능장들이 정말로 사라져가고 있다. 그들이 일평생을 받쳐 온 자신의 기술을 후세에 전해주기 전에, 세월과 생활고가 먼저 그들의 기술을 앗아간다.

제 13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공예)를 수상한 이칠용 공예가는 현장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공예계 변화를 위해 50여 년을 달려온 인물이다. ㈔ 한국공예예술가협회 회장, ㈔ 근대황실공예문화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국가와 정부가 공예계에 대해 무지할 때, 공예인들의 목소리를 모아 앞장서서 외친 인물이었다. 일평생 작품을 일궈온 장인이지만, 관료들이 ‘쟁이’라고 공예인들을 낮잡아 부를 때 화를 내고 바른 것이 무엇인지 짚은 사람이다. 그가 걸어온 세월은 사라질 뻔 한 공예기술을 지켜냈던 시간이자 지금은 사라질 수 있는 공예기술을 붙잡는 토대가 됐다.

50여 년 간 많은 것이 나아지긴 했지만, 더 많은 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이칠용 회장은 여전히 현장에서 달리고 있는 운동가였다. 이 회장의 사무실에는 그가 오랜 시간 모아온 애장품과 전국 공예인들의 높은 실력을 선보이고자 전시해둔 공예품이 가득했다. 그의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우리나라 전통공예품이 가진 묵직한 울림과 찬란한 빛깔이 더해졌다.

▲이 회장 사무실에 전시돼있는 나전칠기 작품 ⓒ서울문화투데이
▲이 회장 사무실에 전시돼있는 나전칠기 작품 ⓒ서울문화투데이

제13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공예) 수상을 축하드린다. 이번 수상 소식이 전해지고 SNS(페이스북)에 900여 분의 축하를 받았다고 했다. 소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국무총리 상이니, 훈장이니 상이란 상은 다 받아봤는데, 이번에 1000명 가까이 내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정말 많이 놀라고, 고마웠다. 역시 언론 쪽의 상은 다르구나 싶었다. 공예인들은 순수하게 자기의 일 밖에 모르고 굉장히 내성적인 사람들이다. 목소리를 내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공예인들에 대한 대우가 나아지지 않는가 하는 고민이 든다.

이번 상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공예 분야를 위해 힘쓰고, 공예인의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싶다. 공예가 어떤 것인지 많이 알리고, 서울문화투데이와도 협조해서 함께 성장하고 싶은 생각이다.

오랜 시간 전통 공예계를 위해 힘써왔다. 지난해엔 서울공예박물관이 개관하는 등 이전보다는 공예계 상황이 나아지고 있는 듯한데,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번 서울공예박물관의 개관은 ‘국립’의 의미와도 같다. 서울공예박물관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많다. 2014년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 연락이 와 서울시청에 가서 공예박물관 관련 회의도 했고, 2016년에는 공예박물관 건립 운영위원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에 참여했다.

당시 회의에서 내가 제안한 것이 있다. 주말이나 공휴일 같이 쉬는 날에 공예박물관에서 벼룩시장처럼 공예품 수리 장터를 운영하자는 것이었다. 조선의 역사가 몇 백 년 이어진 것처럼 각 가정마다 우리나라 전통공예품 한 가지씩은 모두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재 현대인들은 공예품을 접할 기회가 드물어 집안에 전통공예품이 망가지면 쉽게 버려버린다. 그런 과정을 개선시키고, 이를 통해 공예문화를 좀 더 알려보고자 했다.

공예품을 수리하는 과정으로 공예인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시민들은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전통공예에 대해서 배우고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계획을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논의했고, 관련 계약서도 작성해서 내가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박 전 시장 사망 이후에 완전히 사라졌다.

서울공예박물관 개관식 날 오세훈 서울시장이 박원순 전 시장보다 서울공예박물관을 더욱 멋있게 꾸려가겠다고 말했다. 공예박물관의 개관식인만큼 공예인이 위주가 되는 행사이길 바랐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봤다. 하지만, 개관식 날 서울시의회의원들만 잔뜩 소개하고 작품을 기증한 사람들만 언급했다.

개관식에는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방짜유기장인 96세 이봉주님도 문경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참석했었다. 먼 곳에서 온 어르신을 소개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의식자체가 잘못돼 있다고 봤다. 공예박물관은 공예인들이 중심이 되고 공예인과 함께 가족처럼 움직일 수 있는 집단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나쁘게 말해서 예산이나 받아먹는 기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공예 현장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담아 인터뷰에 답하는 이칠용 회장 ⓒ서울문화투데이

여전히 공예계에 아쉬운 지점이 많은 듯 하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현재 공예 관련 책들도 드물다. 그래서 내가 오랜 시간 공예계에 있으면서 모아 온 공예책이나 자료들을 기증하고 싶다고 서울공예박물관에 제안을 했는데, 시스템이 구성돼 있지 않다며 기증을 받지 않았다. 지금 서울공예박물관에 자문위원, 고문위원, 컨트롤 타워는 모두 교수진으로 구성돼있다. 그렇다보니 미술공예, 즉 현대공예 쪽으로만 박물관의 기획이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공예에는 이야기가 있다. 붕어, 잉어, 민어 문양들이 모두 이야기와 의미를 품고 있다. 집 안에 잉어나 민어 같은 물고기 문양의 물건이 있으면, 집에 병도 안 들어오고 집안에 남자들이 출세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민족이 간직해 온 풍습이나 민간 역사, 이야기들을 이어나가고 우리 민족의 정신을 가르쳐야 하는 게 박물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학술적인 전문가들의 존재는 굉장히 필요하다. 하지만, 학술가와 함께 현장에서 실제 작업을 하는 공예인, 장인들도 함께 걸어 나가야 한다.

대중 대상으로 하는 교육, 대중의 공예 저변 확대 등 박물관이나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단위에서 해줘야 하는 일이 있는데, 잘 이뤄지지 않는 실상이다. 특히, 전통공예분야에 대해서는 더욱 홀대하고 있다고 본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漆, 아시아를 칠하다》에 관한 많은 글을 썼다. 전시 내용과 도록 상 오류를 짚은 글이었는데, 어떤 내용인지 듣고 싶다.

한‧중‧일 옻칠 공예와 아시아의 옻칠을 다룬 전시였는데, 전시구성에서 ‘근대 공예’가 빠져있는 것에 의문이 들었고, 210페이지에 달하는 전시도록에도 여러 오류가 있어서 그 내용을 짚은 글이었다. 블로그에 관련 내용을 6편까지 연재했는데, 더 작성할 예정이다.

전시는 우리나라 옻칠 공예를 낙랑, 삼한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 순으로 다뤘는데 갑자기 대한민국 현대 공예로 넘어온다. 조선이후 근대나전칠기 작품들이 모두 빠져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화재이자, 옻칠 공예계의 원로 작품이 단 한 점도 전시되지 않았다. 중국, 일본, 미얀마의 경우 시대를 세분화해서 잘 정리했는데 정작 우리나라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잘못됐다고 봤다.

또한, 한국 현대 공예 전시작들은 모두 현대 공예 교수들의 작품이다. 교수 5명의 작품이 전시됐는데, 심지어 특정 작가의 작품만 많이 전시됐다. 다른 교수들의 작품은 2점에서 5점 정도만 전시됐고, 정해조 작가의 작품만 16점이 전시됐다. 지난해 김정숙 여사가 뉴욕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정 작가의 <오색광율>를 선물했기 때문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웃음)

우리나라와 아시아의 옻칠로 기획된 전시인데, 특정 작가의 작품이 편파적으로 많이 소개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본다. 대중들은 옻칠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전시작을 많이 출품한 작가가 우리나라 옻칠의 대가일 수 있다고 막연하게 추측할 수 있다.

정해조 작가의 작품은 현대적인 옻칠 기법이다. 정 작가의 기법은 건칠 기법(‘협저칠’이라고도 불리며, 모시나 삼베를 심으로 칠을 입히는 기법)이다. 우리나라에도 건칠의 역사가 있지만, 건칠기는 잘 안 만들고 그 역사도 故강창원 공예가가 유일하게 이어온 정도다. 우리나라 전통 공예에서 건칠은 좀 드문 기법이고, 일본적인 경향이 많이 담겼다. 만약 옻칠 중에서도 특히 건칠 기법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런 전시를 기획했다면, 조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옻칠을 전체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전시에서 특정 작가의 작품만 여러 점 전시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짚고 싶다.

▲이칠용 회장이 그동안 모은 공예 관련 자료는 공예 자료관을 만들 정도로 방대한 양이다.
▲이칠용 회장이 그동안 모은 공예 관련 자료는 공예 자료관을 만들 정도로 방대한 양이다. ⓒ서울문화투데이

문화재청 소속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책 「나전장」에서도 많은 오류를 제기했다. 현재 우리나라 공예 기록에 문제가 많이 있는가.

문화재청 산하에 있는 국립문화재연구서에서 정해조 교수가 글을 쓴 책 「나전장」은 오류가 가득하다. 192페이지의 책인데, 이중 112페이지가 틀렸다. 국가무형문화재 제 10호 ‘나전장’ 故 송방웅님이 사망하시기 전 내게 노란 포스트잇으로 오류를 짚은 책과 A4용지 4장을 앞뒤로 빽빽하게 채운 편지를 보내왔다. 책 발간 이후, 이미 2007년에 오류 수정을 요청한 바 있지만,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여전히 답이 없다.

이런 공예기록의 문제는 일제시대 때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고고학이나 미학 같은 것이 없었다. 우리들이 배운 것은 서당이나 성균관에서 배운 이론이 전부였다. 자연스레 고고학이나 미학은 서양문화, 기독교문화에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 후에 일제가 침략해 우리나라의 조선 왕릉을 다 파헤치기 시작했고, 그나마 그 사실들을 인지하고 접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언론계 기자출신들이었다. 해방이후에는 당연히 예용해씨 같은 기자 출신들이 우리 것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조금 깊이 있게 생각하고 정립한 이후에 기록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소위 나쁘게 말해서 친일적인 입장에서 기록을 남긴 것이다. 이후에 이런 것으로 재정립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시절 발행된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곽대웅 교수는 故전성규 나전장이 “1920년 일본 다카오카에 조선나전사가 설립될 때부터 1년 8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자개무늬 주름질에 도입했고 그 실톱을 가지고 귀국해 실톱주름질 기술을 발전시켰다”라는 정보를 작성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다. 우리네 공예 관련 학자들은 우리나라 장인들이 일본에 가서 기술을 배워왔다고 하지만, 반대로 故전성규 나전장이 일본에 가 기술을 전파했다. 일본에 가기 전부터 故전성규 나전장은 실톱주름질 기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관련해서, 서울대학교 미술이론을 전공하고 일본 동경대에서 6년 간 유학 생활을 한 노유니아 연구자의 논문 <‘조선나전사’와 한국 근대 나전칠기>가 있다.

나는 이 오류에 대해 여러 차례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책의 재 발간을 요청해왔다. 하지만,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유명 일간지에 광고를 내거나 공진원이 발간하는 공예잡지에라도 냈으면 달라졌을까, 하는 답답함을 가지고 있다. 공예의 역사를 엉터리로 배우고 있는 현실이다.

50여 년이 넘는 시간동안 공예계의 큰 어른으로 자리를 지켜왔다. 공예계에 만연한 오류에 날카로운 목소리도 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반추하는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나전칠기를 사치품 취급을 했다. 요트, 보석, 대저택 등과 같이 특별소비세를 부과했던 것이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나전칠기 공예품을 사치품으로 취급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나전칠기 장인들과 강력히 항의해 특별소비세를 폐지시켰다. 또한, 공예인들은 작은 공방을 두고 작업을 해야 하는데 ‘제조업’이라는 이유로 공장등록증을 내야하고 무의미한 절차를 따르게 해 작업장을 만들기 어렵게 하는 법률이 있었다. 이에 간이식으로 공방을 꾸릴 수 있도록 ‘가내수공업’이라는 업종 분류 항목을 늘렸다.

1979년부터는 일본과의 교류도 있었다. 84년도에 전용복 작가를 일본에 알릴 수 있었고, 길정본 공예인의 일본 전역 초청전도 개최했다. 공진원과 함께 2013년도부터 《법고창신》전시를 개최하는 등 해외 교류전을 시작한 것도 큰 성과였다고 본다.

현재 ㈔한국공예예술가협회와 ㈔근대황실공예문화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한국공예예술가협회의 경우 거의 종신 회장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 한데, 협회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회장임기가 만료되면 회원들에게 회장에 출마해달라고 공문을 띄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회원은 340명 정도 된다. 그런데 한명도 지원하질 않는다. 사실 공예인들은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공방을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협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1년에 한 1억 5000만 원정도 들어가는 것 같다. 협회 회원들에게 한 달에 1만 원의 회비를 받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내 경우는 과거에 사업을 한 자산과 작품 판매 등으로 비용을 마련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사무실이 위치한 이 공간의 주인이 춘천의 병원장을 하고 있는 분인데, 세를 받지 않고 무료 임대를 해주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 1년에 한 번 전시하고 총회를 하는 그런 협회는 필요 없다고 본다. 공예인들의 협회라면, 공예인들을 위한 큰일을 계속 추진해나가야 하고 공예인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전통공예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얘기하는 이칠용 회장은 긍정의 기운이 가득했다. ⓒ서울문화투데이

한국 공예계 발전을 위한 내부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무형문화재분야도 부익부 빈익빈이 있다. 문화재 분야를 재조사해서 미지정된 문화재 분야를 새롭게 찾아서 지정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매듭 분야도 매듭 자체는 문화재로 선정돼 있지만, 매듭 중 끈목이라는 일부분은 또 문화재에서 제외돼 있는 현실이라서 문화재의 분야를 넓혀야한다고 본다.

또 하나는 명인들에게 인증 번호를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수공예는 인증을 해야 한다. 공예를 20년 정도 해 온 명인들에게는 명인 번호를 줘서, 국가에서 공인을 했으면 한다. 외국인이든, 누군가가 우리나라 전통공예를 찾아왔을 때 헤매지 않고 인증 받은 공예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면 좋겠다.

앞으로 우리 한국 공예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지.

공예인들이 물건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예분야 현황을 알고 깨이길 바란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나서서 싸우고, 공예인들의 저변 확대를 위해 공부도 하고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 또, 공예인이 아닌 다른 분야 예술인들에게도 같은 동료로서 공예에 관심을 많이 가져주길 바란다.

공예인들 스스로 잘 먹고 잘 살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최근에 황순자 매듭 명인이 LG생활건강과 협업을 했다. 전통과 현대의 협업처럼, 명인과 기업의 협업도 많아지길 바란다. 최근에 젊은이들이 타투를 전통문양으로 하는 유행이 일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전통의 맥이 이어지고, 전통공예를 접할 수 있는 기회들이 확장돼가길 바란다. 옛날 것은 고리타분하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전통공예인들이 이 장벽을 넘어서는 것에 시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은 쟁반이나 구절판 그릇을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옻칠만이 가지고 있는 견고함이나 내구성을 내세워 주방집기처럼 실생활에서 많이 접하고 사용할 수 있는 공예품을 제작하길 바란다. 좀 더 규모가 큰 작품을 제작해 소득도 많이 얻었으면 한다.

나는 이 옻칠 공예가 잡초처럼 야생하고 끊임없이 살아남는 분야라고 얘기한다. 나전칠기의 역사는 수천 년이고, 지금은 이 잡초 같은 나전칠기가 잘 다듬어지고 나아가고 성장하는 단계다. 어려울수록 더 많이 노력하고 연구하니까, 앞으로 그 빛을 바랄 수 있을 것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