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우리의 호흡법•소리내기•말하기 등: 배우훈련법 찾아세우기 작업 1
[양혜숙의 장르를 넘어서]우리의 호흡법•소리내기•말하기 등: 배우훈련법 찾아세우기 작업 1
  •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 승인 2022.03.1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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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양혜숙 한국공연예술원 이사장

1991년, 중국이 최초로 서방세계에 자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인 <경극>을 공개하였다. 그동안 공산권 국가들과의 교류에만 그치던 원칙을 넘어 비로서 중국이 서방권 국가들과의 문화교류를 시작한 것이었다. 유네스코 산하의 ITI (International Theater Institute) 와 일주일에 걸친 학술 심포지움인 ‘아시아 전통공연예술의 현재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중국의 보물이라 자랑할 만한 경극의 진수를 펼쳐보여준 값진 경험이었다. 나는 차기 한국 ITI 회장 출마에 관심이 있던 김의경 (당시 실험극장대표) 한국 ITI 부회장과 그 자리에 참석하는 귀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학술분야 분과회의에서는 한국을 대표하여 <한국 판소리에 내재된 공연예술 어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2019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페터 한트케의 언어연극인 <관객모독>을 1969년에 번역하여 한국에 소개한 나는 ‘70년대 한국연극에 첨단의 서구화 물결을 불어넣는 역할의 일정부분을 담당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늘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의욕에 넘쳐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한국연극, 특히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나는 우리 연극이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서양연극 흉내내기에 온통 열을 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했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호흡과 발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꾸며 훈련되어져 왔는가?’ 등의 우리의 정체성 찾기에 꽂히는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나의 한국연극 즉, 한극에 대한 탐구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선, 나는 큰아버님과 아버지가 친구분들과 붓글씨를 한판 벌려 쓰시고는 서로의 필체에 대한 총합평을 끝내고, 단촐한 약주상을 앞에 놓고 시조창으로 한판 멋진 대결을 벌이시곤 하던 6.25 전쟁 이전의 옛추억을 떠올렸다. 당시 네살 아래 여동생은 째즈에 꽂혀 있었고, 나는 서양 클래식 음악에 심취해 있어 그 분들이 부르시던 시조창은 우리에겐 노래도 아니고, 아무 흥취도 일으키지 못하는 그저 먼 옛날의 것이었다. 예의상 마지못해 참아주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독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후에 우리소리에 관심을 갖고 들어보니, 어렸을 때에는 귀를 막고 들었던 그 시조창이 구수한 소리와 긴 호흡으로 특별하게 가까이 다가오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아~~아! 이거였구나!’ ‘사람이 나이 40 이전에는 본능적으로 반 전통을 향해 마구 달리다 40이 넘으면 본인도 모르게 전통의 소리•붓글씨, 그와 동반되는 모든것에 관심이 돌아온다!’는 말이 은연중에 내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게 압도적으로 다가온 우리의 소리는 어쩌다 라디오 ‘전통의 소리’ 시간에 들려 온 김월하 선생님의 가곡, 특히 품격을 담은 가사의 긴 호흡 소리에 꽂혔다. 그리고, 그와 못지않게 우리의 소리내기에 호기심을 일으킨 소리는 김소희 선생님의 판소리 창이었다.  그 후 차츰 우리 소리에 대한 호기심이 좀 더 성숙해 가면서 나는 박병천 선생님의 구음에도 마음이 꽂혔다. 

매년 독일연극을 한편씩 무대에 올리며 서양 연극의 어법을 가르치던 나의 직업적 영역과는 어쩌면 정반대의 관심사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의 전통 소리와 그 발성법, 그리고 그 소리를 품었던 우리시대의 생활환경과 문화배경의 사회조건과 그 시대에 맞는 풍류, 풍취에 관심이 더 쏠렸다. 하지만 ‘7•80년대만 해도 한국의 경제상황은 넉넉지 못했고, 또한 문화적으로도 우리의 전통이라는 대상에 관심을 가질만큼 정신의 품이 넓지가 못했다.

나는 뜻한 바가 있어 우리의 호흡법과 발성법, 더 나아가 우리 조상들은 우리 몸 다스리기를 어디서부터 찾아 올라가 자리를 잡았는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따라서 스스로 우리 공연예술사를 찾아 그 뿌리를 찾고자 나름 꽤 애도 써보았다. 그러나, 그 길을 찾아주는 교과서가 될만한 책은 있지도 않았거니와 우리 아버지들에게 시조창을 가르치던 스승의 세대는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니고, 더구나 6.25전쟁으로 초토화가 되었던 당시 상황으로는 그 스승을 찾아 볼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때 막 자리를 잡고 우리 전통 소리와 춤사위를 찾아 세우기 시작한 국악원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틈틈히 국악원을 찾아 종묘제례악을 찾아 세우고, 그 전통을 지켜오시고, 다른 한편 처용무를 문화재 반열에 올려놓으려 애쓰시며 처용무 탈을 이어갈 후계자를 찾으시는 심소 김천흥 선생님을 자주 만나 뵈었다. 전통의 무슨 요소를 찾아 우리 시대에 적용되는 현대 <우리시대의 배우훈련법>을 완성할 수 있겠는지를 수시로 의논드렸다. 그 어느 스승보다도 스승다우셨던 김천흥 선생님은 조선시대 마지막 왕이셨던 순종의 생신날 큰 춤꾼의 어깨위에 올라 무동으로 춤을 추셨던 명실공히 조선시대 궁중무용의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정서에도 통달하여 봉산탈춤 등 탈춤의 어법에도 참으로 달인이셨다.

뿐만 아니라 김천흥 선생님은 내가 만들고자 하는 <우리시대의 배우훈련법> 마련에도 진지하고 참다운 관심이 지극하셨다. 게다가 더 고마운 일은 스스로 현대식 정규교육을 못 받은 분이 현대교육을 받고 학위를 가진 후배들과 어떻게 교류해야 되는지, 해법을 찾으며 나의 관심에 친절하게 다가와 주셨다. 참으로 만인의 스승이 되실 인품과 지적 호기심이 백수를 다가서며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선배이시며, 진정한 학자이시자 예인이셨던 선생님은, 1996년 내가 <사단법인 한국공연예술원>을 설립해 정중히 모셨을 때에도 초대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아주셨다. 더 나아가 배우훈련 수업시간에는 <김천흥 춤본>을 기초로 배우들의 몸다스리기에 기초가 되는 유연성과 더불어 움직임의 절도를 가르쳐 주셨다.

김천흥 선생님 못지않게 내게 온정과 시간을 아끼지 않고 본인의 연구소를 내어 주시고, 손수 학생들을 지도해 주신 선생님은 '천상의 소리 소유자'로 일컬어지는 김월하 선생님이시다. 또, 김월하 선생님 못지않게 전통의 기반에서 <한국의 배우훈련법 >의 기초 세우기에 관심과 성의를 보여주시며 나를 돕고자 하신 선생님은 판소리의 국보 김소희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늘 가까이에서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다.

특히, 김월하•김소희 선생님의 댁들은 내가 살던 청운동집에서 멀지않은 삼청동과 종로3가 근처였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넓이가 넉넉한 청운동 우리집 거실을 교육장으로 삼아 <우리 소리의 근본>이 어떻게 배우훈련법의 기초가 될 것인지 함께 방법을 찾아가기로 했다. 매주 화요일을 정하여 그날 하루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한국의 소리내기' 방법의 기본을 배우기로 결정해 실천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었던 열정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과정에서, 내가 실망을 하게 된 부분은. 그분들의 소리훈련 방법이 체계화돼 교본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고, 각기 각자의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개인교수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는 일대일식 전수교육이라는 한계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분들에게서 전통의 <소리내기 교육방법의 체계화된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분 선생님들께 그 점을 설명드리고, 그 체계화 작업을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참으로 기대에 부푼, 그리고 흥분되는 나의 모험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