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무형문화유산의 전승, 이해와 의지
[주재근의 얼씨구 한국음악과 문화]무형문화유산의 전승, 이해와 의지
  • 주재근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 승인 2022.03.1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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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근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주재근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최근 들어 부쩍 느껴지는 것이 있다. 차를 운전하고 다니다 정지 신호에 걸려 정차하였다 몇 초만 늦으면 어김없이 뒤에서 클락션을 누르는 것이다. 운전할 때 마다 당하다 보니 편한 운전이 아니라 강제로 자동차 레이싱 경주장에 출전한 선수가 된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5초를 기다리지 못하는 그들에게 우리나라 전통음악에서 가장 느린 가곡 초수대엽 ‘동창이’나 기악합주곡 영산회상 가운데 ‘상령산’을 들려주면 어떨까 하는 재밌는 생각을 해 본다. 아마도 듣다가 지루함을 넘어 졸도 실신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 높은 산, 긴 강은 없어도 가장 느린 음악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가 있다. 이 시조는 조선조 숙종때 남구만(1627~1711)이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반대하다가 강원도 망상으로 유배가서 지은 시조시이다.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거진다
           소 치는 아희놈은 상긔 아니 일었느냐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이러한 시조시를 한 명의 가객(歌客)이 단정하게 앉아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장고 등의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것을 가곡(歌曲)이라고 한다. 가곡에서 ‘동창이’ 세 글자를 부르는 데에만 무려 23초가 걸린다. 배꼽 아래 단전에서부터 심장을 타고 뇌로 올렸다가 목구성을 뿜어 나오는 긴 호흡을 한다. 이러한 건강한 호흡으로 신중하게 장중한 가락들을 가사의 의미에 따라 엮어 가는 것이 가곡의 제멋이다.

요즘 대중가요동호인, 합창동호인 등 노래 동호인 모임이 있듯이 조선조 후기에도 노래 동호인 모임인 가단(歌壇)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8세기 전반기 김천택(金天澤)을 중심으로 한 경정산(敬亭山)가단, 18세기 중반기 김수장(金壽長)을 중심으로 모인 노가재(老歌齋)가단, 19세기 후반 박효관(朴孝寬), 안민영(安玟英)을 중심으로 승평계(昇平契) 등 노래 모임이 있었다. 이와같은 노래 모임은 한양을 비롯한 전국의 도시에서 풍류문화를 주도하면서 가곡 레파토리의 확장과 가집편찬 등 가곡이 더욱 예술화되면서 활성화하는데 기여하였다.

가곡은 고려시대 음악인 ‘「정과정(鄭瓜亭)」에서 비롯 되었다’ 라는 <양금신보(梁琴新譜)> (1620) 기록에 의거 약 600여년의 전승역사를 가지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1973년 가곡을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하였고, 유네스코(UNESCO)에서는 2010년 가곡의 전승성, 예술성, 가치성 등을 고려하여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올해 2월, 조선 후기까지 구비 전승된 총 580수의 노랫말을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집(歌集)인 <청구영언(靑丘永言)>을 국가보물로 지정예고 하였다. <청구영언>은 <해동가요(海東歌謠)>, <가곡원류(歌曲源流)>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가집으로 불리는 것으로 조선 후기 시인 김천택(金天澤)이 1728년 편찬한 것이다. ‘청구(靑丘)’는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이고, ‘영언(永言)’은 노래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의 노래가 입으로만 읊어지다가 없어짐을 한탄하여, 기록하여 전하고자 편찬하였다고 한다.

<청구영언>의 보물 지정 예고 소식을 듣고 이웃 나라 일본의 가집 <만요슈(萬葉集)>가 떠 올랐다. 이 책은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서 걸쳐서 만들어졌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가집이다. 전 20권으로 약 4,500수의 노래를 수록하고 있으며 일본인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자부하며 자랑하고 있다. 일본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유형의 문화재는 17세기를 넘는 것이 많지 않다. 왜 일까. 1572년 임진왜란과 1910년 이후 36년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모두 불태워졌거나 약탈되어 일본으로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유형의 문화유산들은 우리 땅에서 흔적 조차 없이 사라질 수 있지만 무형의 문화유산들은 우리가 존재한 영속할 수 있다. 단 우리의 정신이 그 전통의 세계를 이해하고 잇고자 할 의지가 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