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강의 뮤지컬레터]윤부길을 아시나요?
[윤중강의 뮤지컬레터]윤부길을 아시나요?
  •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 승인 2022.03.1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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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윤중강 평론가/ 연출가

1938년 4월 9일, 경성음악전문학원이 개원했다. 안기영(安基永)과 윤부길(尹富吉)은 여기서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경성음악전문학원이 개원할 때, 조선에서는 레코드회사가 악극(가극)으로 흥행하던 시기였다. 오케레코드와 빅타레코드에 비해, 콜럼비아레코드는 후발주자였다. 그러나 콜럼비아악극단의 레퍼토리는 확실히 차별화되었다. 동아일보 출신의 설의식(1900∼1954)의 기획과 대본을 바탕으로, 연출은 서항석, 작곡은 안기영이 맡았다. 

이 단체는 가극단 라미라(羅美羅)로 이름을 바꾸면서, 예술성과 대중성의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 ‘향토가극’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위의 트리오의 역할이 컸다. ‘콩쥐팥쥐’를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서 공연했는데, 다재다능한 인물이 무대에서 돋보였는데 그가 윤부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클래식 컨서바토리로 할 경성음악전문학원의 1기 졸업생이다. 윤부길은 콩쥐를 도와주는 소 역할로 무대를 장악했고, 콩쥐는 성경자(고향선)이 맡았다. 윤부길은 코믹한 연기로, 성경자는 무용이 돋보였다. 라미라공연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윤부길과 고향선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1942년) 이들이 바로 윤항기와 윤복희의 부모. 

‘원맨쇼의 선구자’ 윤부길은 복화술에도 능했다. 비슷한 시기에 반도악극좌(半島樂劇座)에선 무대엠씨와 만담으로 전방일(1916년생)이 인기를 끌었는데, 그 또한 복화술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훗날 후라이보이 곽규석(1928 ~ 1999)의 복화술과 개그도 널리 인기를 끌었는데, 연원을 따진다면 이들이 원조이다. 
 
윤부길을 아는 사람은 지금 많지 않다. 이 땅에서 뮤지컬의 계보를 따진다면, 윤부길을 빼놓을 수 없다. 베토벤과 슈베르트로 보이는 두 사람의 오래된 흑백사진이 있다. 베토벤은 윤부길, 슈베르트은 김해송. ‘비운의 천재’ 두 사람은 해방 이후 한국적인 뮤지컬을 개척했다. 해방이후 김해송과 윤부길은 호형호제하면서 ‘따로 또 같이’ 공연했다. 김해송은 KPK로 활약했고, 윤부길은 ‘부길부길쇼’로 유명했다. 과거 조선악극단(오케그랜드쇼)의 ‘아리랑보이즈’(4인)를 KPK공연(1947~1950)에서도 무대에 올렸는데, 이 때는 현경섭, 윤부길, 김해송, 박시춘이다. 남녀의 만담콤비로 윤부길과 박옥초가 활약을 했는데, 윤부길이 세상이 떠난 후엔 이종철과 박옥초가 콤비를 이뤘다. 

한국전쟁기에도 윤부길은 크게 활약했다. 불안한 세상에서, 그가 만들어내는 웃음은 당시엔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여러 악극단에서 활동했던 재주꾼들이 윤부길을 필두로 ‘부길부길쇼’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윤부길은 직접 자신을 그린, 자신의 캐리커처 자화상으로 광고를 하기도 했다. 그가 얼마나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았던가를 알 수 있는 일면이다. 윤부길은 당시 유행했던 리듬을 공연 속에서 잘 살렸다. 스윙스타(1952년), 아리랑룸바(1953년) 템포템포센세이션(1954년) 맘보잠보곰보(1955년)와 같이 그가 만들어서 인기를 끈 어트랙션(attraction)이다. 

1953년 12월 19일, 서울 중앙극장. 다섯 살의 어린 소녀가 데뷔했다. ‘윤부길과 그 클럽’이란 명칭으로 ‘오색 크리스마스’를 공연했다. 구성은 윤부길, 안무는 고향선. 부모와 함께 한 이 데뷔 무대를 윤복희는 기억할 것이다. 

1958년에 개봉한 ‘안개 낀 서귀포’(임한림 감독)은 ‘한국최초 목장영화’를 표방했다. 멕시코가 무대가 된 ‘마카로니 웨스턴’이 있었다면, 이 영화는 ‘제주 웨스턴’이라 해야 할까? ‘황야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었다면, ‘안개 낀 서귀포’엔 윤부길과 황해가 있다. 이 영화에서 윤부길과 윤복희는 부녀로 출연했다.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 없어 매우 아쉽다. 우리는 앞으로 윤부길은 더 알아야 한다. 그냥 지나칠 수 있다. 해낸 일이 참 많은 윤부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