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공백, 그리고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공백, 그리고 드라이브 마이 카
  • 윤이현
  • 승인 2022.04.08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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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윤이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최근 윤영채에서 윤이현으로 개명했다.

기다려주신 분들이 얼마나 되실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새로운 일들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었다. 봄과 동시에 내 몸에 퍼진 무기력과 싸워가며 일상을 살다 보니 어느덧 글을 적는 일이 참으로 버겁게 느껴졌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나의 나태함에 대한 핑계이며, 글 시작에 앞서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었다. 이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여자 없는 남자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적어본 짧은 글이다. 새로운 시작, 그리고 나의 공백을 깨려는 작은 신호임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침대 위의 두 사람. 오토와 가후쿠다. 둘은 20여 년 전에 딸아이를 여의고 각자 각본가와 연극배우의 일을 한다. 남편 가후쿠는 며칠 뒤 있을 연극 심사를 위해 러시아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오게 되는데, 비행기가 결항 되었다는 안내를 받고 다시 짐을 싣고 집으로 온다. 인기척이 들리는 집 안. 그곳엔 아내와 낯선 남성이 있다. 가후쿠는 그들의 외도를 목격한다. 그는 잠시 그들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집 밖을 나선다. 오토와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았던 가후쿠. 그는 그날의 일을 모른 척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한 가후쿠는 시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다음날 워크숍 강의를 위해 집을 나서려는 가후쿠에게 오토는 저녁에 잠시 이야기 좀 하자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보니 오토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 충격으로 가후쿠는 바냐 아저씨연극에서 주인공 연기를 완전히 망치게 되고, 2년 후 히로시마에서 예술 감독으로 여러 국적의 배우들을 고용해 연극을 연출하게 된다. 배우 가운데 과거 오토와 불륜을 저질렀던 그녀의 제자로부터 그녀가 가후쿠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과 이야기들을 전해 듣게 된다. 이곳에서 만난 드라이버 미사키 역시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후 어머니와 아내의 고리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두 사람은 차차 마음을 열어간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포스터 (https://blog.naver.com/)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포스터

 

나는 위로에 퍽 재능이 없는 편이지만, 가끔 진정한 다독임이란 무엇일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곤 한다. 따듯한 말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것?, 아니면 낯간지러운 단어를 섞어가며 그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행위? 이런 피상적인 고민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들은 썩 효과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내가 애써 위로하려 말을 하면 할수록 상대는 입을 닫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는가?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기로 했다. 나는 언제 위안을 얻었던 걸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미안하지만 남의 불행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아 당신도 힘들었군요. 난 또 나만 이 세상에서 힘든 줄 알았지 뭐예요 하하하.’ 속으로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토록 우러러봤던 존재들이, 삶이 가져다주는 고통 앞에서 한없이 고꾸라질 때. 바로 그때 생채기 난 가슴에 서서히 새 살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오늘 그대 앞에 나의 상처를 드러낸다. 누군가의 눈엔 자유롭게 사는 것처럼 보일진 몰라도, 매일 불안에 떨고 있음을 고백한다. 날이 갈수록 선택하는 일은 어렵고, 젊음은 요즘따라 나를 향하는 화살이 된다. 관심을 표하는 이들에게조차도 마음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정말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60%의 진심만 털어놓을 정도로 점점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조심스럽다. 수중엔 땡전 한 푼 없는 데다, 다들 취업 준비에 한창인데 나는 아무것도 쌓아둔 게 없다. 게다가 높았던 자의식과 자격지심의 충돌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솔직히 요즘은 뭘 해도 즐겁지가 않다. 그나마 나를 웃게 하는 건, 아껴둔 영화를 보는 일이며 매주 도서관에서 빌려온 두 권을 대하는 것이다. 글쓰기도 더는 내 공허를 채워주지 못한다.

, 어떤가. 위안이 되었는가? 당신이 지질하기 그지없는 나의 인생을 안주 삼아 깔깔거릴 수 있다면 좋겠다. 입술을 씰룩거리며 속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아 정말 위로가 되네!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구나!’라고. 그것이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공명(共鳴)하게 될 테니. 그리고 진정으로 당신과 나는 우리가 된다.

위로: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는 행위.’ 오늘로써 나는 이 사전적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려 한다. ‘위로: 감춰온 상처를 솔직하게 꺼내어 보임으로써 마음으로 진동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속 한 장면 (출처:https://blog.naver.com/)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속 한 장면

메타포니 미장센이니 잘 모르겠고,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그래도 내 인생이 더 낫네.’ 딱 이뿐이었다. 터널을 지나 가후쿠와 미사키의 붉은 차량이 도로 위로 드러났을 때, 나 역시 그들의 옆자리에 앉아 삶이란 긴 여정을 항해할 준비를 마쳤다. 이들의 불행에 몸을 실음으로써 가후쿠, 미사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되었다. 방지턱을 넘다가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다 떨어질 때 공명했다. 어쩌면 이것이 예술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포개어 오늘도 도로 위를 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