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Interview]문화대상 최우수상(무용) 수상자 김충한 교수“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랴”
[Artist Interview]문화대상 최우수상(무용) 수상자 김충한 교수“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랴”
  • 인터뷰 ㆍ정리/이은영 발행인, 진보연 기자/사진 김재성 기자
  • 승인 2022.04.1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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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춤의 정체성과 발전 방향, 나의 오랜 과제”
정동극장 ‘미소’ 시리즈 등 상설공연으로 전통연희 브랜드화 정착
‘우리춤체조’ 탄생, 한국춤 저변 확대 기틀 마련

[이은영 발행인ㆍ진보연 기자/사진 김재성 작가]“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만적은 고대 로마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와 비견되곤 한다. 두 사람 모두 최하층 신분으로서 불평등한 계급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살았던 기원전 1세기, 로마는 영토를 확장하고 부를 축적하며 점차 타락했다. 다만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뿐만 아니라 농장과 광산의 노예까지 전부 모아 로마 전역을 휩쓸었지만, 만적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비참하게 끝을 맺었다. 반란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만적을 움직이게 한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이는 훗날 동학농민운동의 모태가 됐고, 지금까지 살아 일렁이고 있다.

▲경기도립무용단 ‘률’ ⓒ경기아트센터
▲경기도무용단 ‘률’ ⓒ경기아트센터

경기도무용단이 지난 2020년 레퍼토리 시즌 작품으로 선보인 ‘률(律)’은 만적의 난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무용극이다. 김충한 당시 예술감독은 한국판 ‘스파르타쿠스’를 표방했다고 밝힌 바 있다.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작품 속에서, 가상의 인물 ‘률’은 만적이 미처 이루지 못했던 자유와 해방의 혁명을 완성한다. ‘률’을 처음 선보였던 2020년은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맞던 해였고, 재연 무대를 올리던 지난해는 미얀마 군부쿠데타로 세상이 어지러웠다. 김충한 교수는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와 지금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울림을 주리라 확신했다”라고 말한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를 관통하는 김충한 교수는 명무 정재만의 수제자이자 애제자로 통한다. 여성 중심이던 당시의 무용계에서 정재만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남성춤의 역동성과 활기찬 움직임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국립무용단에 재직하며 ‘전통춤’과 ‘창작춤’이라는 이질적인 긴밀성을 어떻게 몸으로 익히고 이를 어떻게 작품으로 내재화시켜 이끌어 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거듭했다. ‘신화를 삼킨 섬’(2004), ‘채화연풍’(2005), ‘승무도’와 ‘신화’(2007)를 거쳐 제29회 서울무용제 대상이라는 영예를 안겨 준 ‘무고의 옥’(2008) 등의 작품을 통해 무용수이자 창작자로서의 일관된 의지를 보여준 바 있다.

이후 그는 정동극장에서 한국무용사에 있어 첫 도전이었던 상설공연 ‘미소’ 시리즈와 ‘련, 다시 피는 꽃’, ‘에밀레’ 등으로 성공을 거뒀으며, 고령화 시대 노인들을 위한 ‘우리춤체조’를 서울대 의학연구원 체력과학 노화연구소와 함께 연구해 보급에 앞장서는 등 한국춤의 미래적 전망을 모색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왔다. 

‘늘 푸른 소나무 같은 예술가가 되라’는 스승의 말씀을 근간으로 새로움을 발견하는 김충한 교수를 만나, 한국춤의 예맥을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 물었다. 

▲김충한 세종대학교 초빙교수
▲김충한 세종대학교 초빙교수

제13회 서울문화투데이 최우수상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시상식 당시 전하지 못한 수상소감과 상을 받은 소회가 궁금하다.

문화예술 각 분야의 훌륭한 장인들과 한 자리에 설 수 있어 영광이었다. 무용인생에 있어 크게 자리잡을 순간이 될 것이다. 무대에 서거나 만들 때, 나에게 있어 항상 최고의 화두는 ‘공감’과 ‘감동’이며, 많은 이들과 함께 소통하는 것이었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무용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며, 진실된 박수를 받는 예술가가 되겠다.

지난 1월 수상 소감으로 밝혔듯, ‘공감을 통해 감동을 이끌어내는 무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무용을 감상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많은 이들이 “무용은 어렵다”라고 말한다. 특히 창작무용에 대한 이해와 인식에서 현저히 그러함을 알 수 있다. 나는 예술이란 이름으로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거나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알아듣지 못했고 공감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실패한 작품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 이렇듯 안무자나 행위자만 즐거운 예술은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관객과 만나고 있다. 

지난해 5월까지 예술감독으로서 경기도립무용단을 이끌었다. 스승이자 도립무용단의 초대감독인 故 정재만 교수를 따라 창단 공연 무대에 오른 만큼, 도립무용단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을 것 같다.

스승이신 정재만 선생님의 크나큰 가르침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김충한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기도립무용단은 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운명이고 필연이며, 또한 행운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덧 스승이 걸어간 길을 걸을 수 있게 됐다. 임기 동안 무용실에 걸린 창단공연 포스터를 보며 내내 스승과 함께 했다. 전통성과 대중성, 예술성을 매우 중요시하며 무용계에 헌신해온 스승의 끝나지 않은 고뇌와 번민을 이어받아 고민하고 땀 흘리며 예술감독직을 수행했다.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최우수상(무용)을 수상한
김충한 교수 ⓒ김재성 기자

경기도무용단에서는 취임하자마자 코로나 펜데믹으로 제대로 역량을 다 펼쳐 보여주지 못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만적의 난을 다룬 대작 ‘률(律)’을 만들었다. 작품과 당시 제작 과정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

무용이라는 장르에 스펙터클한 뮤지컬 요소를 접목시킨 댄스컬 <률(律)>은 ‘만적’이라는 고려시대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했고, 한국판 스파르타쿠스를 이야기한다. 발레무용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스파르타쿠스’를 한 번도 다뤄진 적 없는 한국무용의 언어로 풀어내고 싶었다.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현재 지쳐있는 우리 사회와 관객들에게 울림을 주리라 확신했다. 

특히 <률(律)>을 처음 선보였던 2020년은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맞던 해였다. 때문에 작품의 내용과 연관지어 ‘너무 정치적인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고, 다만 작품으로 하여금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다면 어렵게 올리는 공연에 의미가 더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이어 지난해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해 완성도를 높여 선보인 재연 당시, 미얀마 군부쿠데타로 세상이 어지러웠다. <률(律)>이 전하는 메시지가 시류와 맞닿아 있다 보니 미얀마의 일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극이 끝난 후 영상을 통해 ‘미얀마의 민주항쟁을 지지한다’는 뜻을 전했다. 혁명의 순간을 역사는 기억할 것이며, 역사는 계속 되풀이된다는 메시지를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

국립무용단 재직 당시, ‘전통춤’과 ‘창작춤’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시기였다. 이질적 긴밀성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과,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대표적인 작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국립무용단에서 활동할 당시는 무용극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송범, 조흥동, 국수호 선생들의 작품과 큰 무대를 접하면서 무용작품에 대한 꿈도 함께 성장하는 시기를 보냈다. 해외 여러 작품들 속에서 우리만이 가진 차별성을 발견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나의 이름 앞에는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가지고 가장 현대적으로 해석해 내는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대중성과 예술성은 물론 시사성을 관철하는 작품을 위해 항상 고민하며, 이 과정 속에서 김충한식 ‘댄스컬’이 탄생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동극장에서 선보였던 상설공연 ‘미소’ 시리즈와 ‘련, 다시 피는 꽃’, ‘에밀레’ 등은 한국무용 관객의 저변확대와 작품 브랜드화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을 받는다. 전통연희 연작물은 처음 어떻게 시작된 기획인가?

최정임 극장장 취임 후, 정동극장의 미션과 비전인 명품화, 세계화, 대중화를 바탕으로 한국전통공연브랜드의 정착을 위해 ‘미소’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상설공연 활성화 현황 조사 연구에서 한국 14개 상설공연 단체 중 종합평가 1위를 받았으며 유료 관객 점유율 72%로 연 13만 관객을 유치했으며, 한국전통문화예술이 현대적으로 재창조된 K-Culture의 선두이자 대표작품으로 지금껏 깨지지 않는 성과로 기록되고 있다. 

▲정동극장 전통 상설공연 ‘미소’

당시 작품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1997년 ‘전통예술무대’에서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처음 시작돼 2008년 처음 ‘미소’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전통 상설공연은 2016년까지 공연관광시장을 선도해왔다. 이 공연의 주요 타겟층은 외국 관광객들이다 보니, 공연의 포커스도 거기에 맞춰졌다. 강강술래, 놋다리밟기, 쥐불놀이, 버나놀이, 신방구경 등 한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 요소들을 녹여냈다. 또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춤도 다양하게 선보였다. 모듬북과 오고무, 화전태무, 학도연모의 춤, 춘향의 한탄무, 몽룡의 결의춤 등이 대표적이다. 

하나의 콘텐츠가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미소’가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은 끊임없는 변화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용, 기술, 연출 기법 등 그대로 올라간 적이 없다. 매번 업그레이드를 해나갔고, 그 기반에는 관객들의 평가가 있었다. 의견을 수렴해 작품에 녹여냈기에 점점 더 관객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국내외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만족도에서 매번 1위를 차지하며 최우수 평가를 받아왔지만, 정권이 교체되면서 공연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문화예술 분야, 특히 대중의 주목을 쉽게 받지 못하는 전통예술 분야의 경우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어렵게 이룬 것들이 외부적인 이유로 사라지게 됐을 때, 이전만큼 쌓아올리기란 정말 쉽지 않다.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국공립예술극장만의 고유한 레퍼토리가 보호되길 간절히 바란다. 

상설공연은 외국 관광객이 주요 대상이었던 만큼, 코로나19 상황 등으로 인해 존속이 어려워져 지난 2020년 종료됐다. 국립예술단체에서 전통연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어떤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최정임 극장장 재직 당시 정동극장을 국립으로 추진하려던 사업이 근래 열매를 맺어 국립정동극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국내ㆍ외 사정으로 인한 상설공연의 종료는 매우 안타깝다. 상황이 좋아지면 꼭 다시 진행 되어야할 사업이라 생각하며, 상설공연의 파급력과 생산성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로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최선의 방법이라 확신하고 있다. 다만, 최강의 스탭진 구성과 상시적인 모니터링을 통한 작품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며, 이를 위한 국가적 지원은 필수적이다. 

무형문화재 지정과 관련해 전통무용계에 몇 년 전 여러 잡음이 많았다. 전통무용을 기반한 창작을 해 나가는 예술가로서 무형문화재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나는 무형문화재 이수를 하지 않았지만, 한국무용에 있어 문화적 뿌리를 이루는 전통과 계승은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다. 사실 전통의 뿌리이신 이매방 선생님과 한영숙 선생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이를 이어 받은 정재만 선생님과 이애주 선생님 강선영 선생님도 이제 안 계시다. 선생님들이 자주 해주시던 말씀이 있다 “복사본이 원본을 따라갈 순 없다.” 맞는 얘기다. 무용은 신체의 움직임인데, 사람마다 신체의 구조와 모양이 전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동작을 배우더라도 다르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 한영숙 선생님의 제자, 정재만과 이애주의 색깔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인간이 문화재로서 전승되는 것은 맥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종목에 문화재를 지정해야 할 때이다. 

▲김충한 교수의 승무 공연 모습
▲김충한 교수의 승무 공연 모습

앞서 언급했듯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인 벽사 정재만 선생의 수제자이다. 어떻게 한국무용을 시작하게 됐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스승께서는 ‘늘 푸른 소나무 같은 예술가가 되거라’라고 말씀하셨다. 한결같이 노력하라는 의미로 받들며, 묵묵히 예술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또한 나에게 유독 많은 작품을 남겨 주셨는데, 이 또한 내가 지키고 발전시켜나갈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다. 활동을 하면서 힘에 부칠 땐 스승을 떠올리며 위안 삼고, 많은 것들을 새로이 발견해내곤 한다. 이것이 스승께서 나에게 남겨 주신 힘이자 내가 지닌 춤 세계의 원동력이라 말하고 싶다. 

여전히 무대에 서고 있는 ‘현역’이기도 하다. ‘한량무’ 공연이 뇌리에 잊혀지지 않고 남아있다. 무대에서 춤꾼으로서 보여주고 싶은 것과 각오가 있다면.

흔히들 예술가들은 무대에서 태어나 무대에서 죽는 것이 운명이라는 말을 하지 않나. 나도 동감하는 바이다. 다만, 무대 위에서 언제까지 춤을 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5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들다 보니 무용가로서 무대에 서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더불어 창작 안무를 하는 횟수는 점점 줄고, 전통안무를 활용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내 몸의 컨디션이 해마다 달라짐을 느낀다. 워낙 젊을 때부터 춤을 춰왔기 때문에 몸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진통제가 있어야 무대에 설 수 있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진 계속하고 싶다. 그러다 내 모습이 추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온다면, 스스로 내려오려 한다. 그 평가는 남의 평가가 아닌 오로지 내 몫이다. 슬프게도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최대한 무대 위에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나 상태를 체크하고 단련하는 수밖에 없다.

지키고 싶은 한국 춤의 정체성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고 싶은 지향점이 있다면?

승무 예능보유자인 故 정재만 선생의 제자로서, 한국춤의 정체성과 발전 방향에 대한 고민은 오랜 나의 과제이자, 무용계 전체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서양무용의 경우를 살펴보면 모던이 탄생하기까지 분명 클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00년을 넘게 차곡히 쌓아온 우리 전통춤의 계승ㆍ발전을 위하여 과연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지, 앞으로 맞이할 100년을 위해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이다. 

▲김충한 교수의 세종대학교 수업 장면 ⓒ김재성 기자

교단에서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강조하는 자세와 태도가 있는지?

한국 전통무용계 거목 한영숙 선생이 초대 교수를 지낸 세종대학교 무용과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나 역시 모교인 이곳에서 한국무용의 맥을 잇고 있다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낀다. 3년 전부터 후배들을 교육하며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 인가?’라는 자아발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국적 불명의 춤들이 난무하는 한국무용의 형태가 감지됨에 따라 역사와 전통이 공존하는 올바른 한국무용의 좌표를 제시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뿌리를 단단히 내리지 않은 나무는 흔들리기 마련이다. 내가 가진 색이 무슨 색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유령처럼 떠도는 수밖에 없다. 

그간 중앙부터 광역, 기초 문화재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단체의 안무와 예술감독을 맡아왔는데, 이를 통해 느낀 개선 필요 지점이나, 새 정부에 요구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긴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점은 단원들의 노화였다. 무용은 몸으로 하는 예술이기에 신체적인 요소가 아주 중요하다. 다른 장르는 나이가 들수록 그 분야에 대한 깊이가 무르익는 경우가 많지만, 무용은 다르다. 안무를 잘 소화하고 표현할 수 있는 나이의 제한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대부분의 무용단은 다른 예술단과 정년이 비슷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단순히 무용단원의 정년을 줄이자는 것이 아니다. 다른 예술 장르와 무용을 같은 잣대로 두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정년이 짧다면 그만큼 활동 기간에 받는 연봉 책정도 다르게 매겨져야 할 것이다. 퇴직 후에도 활동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된다면, 연륜이 쌓인 단원의 인프라가 지금보다 더욱 활발히 활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젊은 무용수들의 입단 시기도 당길 수 있어, 무용단 전체에 선순환을 가져올 것이라 판단된다. 

▲김충한 교수의 세종대학교 수업 장면
ⓒ김재성 기자

춤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간혹 예술도 정치를 닮아 가는 세태를 보면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예술은 정치에 따른 흥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순수하게 예술로써 그 기능을 수행하며 세상을 대변하기도, 세상을 앞서가기도 하는 것이 예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춤으로 세상을 말하며, 진정성을 지닌 한국적 춤사위와 현대적인 해석으로 세상과 만나고 싶다. 

앞으로 준비하고 있는 공연은?

우선 5월에 있을 (사)춤하나문화진흥회의 공연을 준비중에 있다. 무용의 대중화라는 화두에 맞춰 춤체조를 개발·보급한지 어언 30년이 다 되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춤을 접하면서 삶에 변화와 희망을 보았고 이러한 과정들이 무대 위에 고스란히 담겼다. 보는 것만이 아닌 함께 즐기며 향유하는 예술로 변화된 춤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다. 

또한 근대 춤의 아버지라 불리는 한성준 탄생 150주년이 성큼 다가온 현시점에서, 지금까지의 한국춤을 바라보고 다가올 미래를 제시할 수 있는 작품을 구상 중에 있다. 다소 포괄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으나,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할 과도기적 관점에서 한국춤을 바라보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느꼈다.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작품을 만드는 것이, 나에게 맡겨진 크나큰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경제, 과학 및 의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평균수명을 연장시켜 고령화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체력저하 및 전반적인 기능이 약화되는 노인들을 위해 지난 1999년 서울대 의학연구원 체력과학 노화연구소에서 ‘우리춤체조’를 개발했고, 연구소장 박상철 교수의 제안을 받아 안무자로서 프로젝트를 함께하게 됐다. 우리춤체조는 대중적인 전통춤사위로써 생활무용의 일환으로 자리 잡았다. 활동 범위 또한 넓어져, 참가 연령이 40대까지로 확장됐으며 전국에 걸친 회원만도 10만 명에 이를 정도의 눈부신 외형적 성장을 이뤘다. 이후 <한국 춤하나 문화진흥회>란 이름으로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재출범의 새로운 도약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춤체조의 운동프로그램은 기본형인 1단계와 2단계에 멈춰있다. 여성노인의 건강관련 체력에 미치는 효과 분석 이후 순발력과 민첩성이 강화된 동작,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초체력 및 보행능력을 높일 수 있는 응용 구성이 필요한 상황이다. 처음 단체가 연구소를 통해 춤체조가 개발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개발, 연구를 통한 효과 검증, 지도자 육성, 보급, 활성화를 위한 축제 등 이벤트 진행을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고령화 시대, 우리춤체조는 노인 복지문제의 대안으로 작용할 것이라 확신한다.